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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2014년 4호] 경영자독서모임 - 돈키호테
발간일 2015-01-13 첨부파일 사진9.jpg

[경영자독서모임]

 

돈키호테

 

(안영옥 고려대학교 서어서문학과 교수)

 

이 원고는 2014 11 24일 안영옥 님의 MBS 강의를 바탕으로 서울과학종합대학원대학원(aSSIST)와 산업정책연구원(IPS)에서 작성하였습니다.

 

대부분 ‘돈키호테’라고 그러면 이상과 현실 양면의 불일치를 상징하는 하나의 기표로서 사람들에게 많이 다가왔습니다. 여러 가지 형식들이 많습니다. 만화로도 있고 또 드라마도 있고 여기서 여러분들한테 소개 하는 것은 뮤지컬입니다.

이 뮤지컬은 미국의 데일 와써맨(Dale Wasserman)이라는 사람이 ‘돈키호테’ 작품을 뮤지컬로 만든 것입니다. 그런데 이 데일 와써맨은 원래 1959년에 CBS 미국 TV 드라마로 이 작품을 만들었습니다. 그런데 그 때 제목은 ‘Im Don Quixote’였습니다. ‘나는 돈키호테다’라고 그런 제목이었습니다. 그런데 뮤지컬로 된 것은 1965년입니다. 옆에 지도를 보시면 ‘Man of the La Mancha’’입니다. 처음에는 ‘Im Don Quixote’’였느냐 하면 1959년 그때는 라 만차(La Mancha)가 어디인지를 사람들이 몰랐습니다. 그런데 스페인이 1960년대부터 외국에다가 문을 열면서 많은 관광객들이 들어오면서 스페인이 알려졌습니다. 그래서 라 만차입니다.

라 만차라는 것은 여기가 마드리드 시이면 이 지역이 까스띨랴라 라 만차(Castilla-La Mancha)라는 지역인데 스페인은 17개의 자치지역으로 되어 있습니다. 각 지역마다 대통령이 있습니다. 그런데 이 까스띨랴라 라 만차 중에서 네 개의 주가 되어 있는데 그 중에 세 개의 주가 라 만차 지역에 속합니다. 돈키호테의 여정을 가시면 바로 이 지역을 다 돌아보시고 그리고 속편에 나오는 지역이 바로 사라고사 근처로 가서 바르셀로나로 가서 돌아와서 다시 이 라 만차에서 이야기가 끝납니다.

제가 들려드린 이유는 아까 제가 말씀 드린 것처럼 오늘도 보니까 여기 등록하신 분은 상당히 많은데 이 자리에 참석하신 분들은 듣기보다는 조금 적은 것 같습니다. 그 이유는 ‘돈키호테’라고 그러면 그냥 현실과 이상과의 싸움에서 결국은 그 현실의 거대한 벽에 무너져 내린 이상주의’ 이야기가 아니냐? 그렇게만 알고 계실 것 같습니다. . 그렇습니다. 그게 가장 큰 테마입니다.

그런데 만일 그것만이었다면 왜 생트 뵈브 이 사람은 프랑스의 문예비평가인데 아주 철저한 문헌 연구로 이름 있는 사람입니다. 이 사람이 뭐라고 그랬느냐 하면 ‘돈키호테’를 인류의 바이블이라고 했습니다. 여러분들 바이블이라 그러면 인류가 그것을 본보기로 삼아서 반드시 따라서 행해야 하는 가장 권위 있는 작품이라는 이야기입니다. 여러분들 성서가 대단한 것은 압니다. 인류가 본 받아야 할 그러한 책이라는 뜻입니다. 그 다음에 르네 지라르라고 이 사람은 문학 비평가이면서 사회 인류학자인데 ‘돈키호테’ 이후에 쓰여진 소설은 ‘돈키호테’를 다시 쓰는 것이나 아니면 그 일부를 쓰는 것이라는 이야기를 했습니다.

위의 생트 뵈브의 평가는 내용을 두고 한 평가라면 밑의 르네 지라르의 평가는 형식을 두고 한 평가입니다. 그 이유는 뭐냐? 지금 현대의 후기 모더니즘에 나타나는 문학 현상이 벌써 ‘돈키호테’ 이 1605년 이 작품에서 다 나타나고 있기 때문입니다. 예를 든다면 상호 텍스트성입니다. 이런 것 굉장히 어렵습니다. 제가 리스트를 봤습니다. 문학 쪽으로 강의하신 분은 별로 없으셔서 친절하게 설명을 해 드리겠습니다. 즉 이 ‘돈키호테’는 기존에 유행하고 있던 기존 소설, 기사 소설을 패러디 한 것입니다. 그러니까 패러디 한다는 것은 그 권위를 강등 시켜게 해서 우스개 감으로 만든다는 이야기입니다. 그러니까 상호 텍스트성, 즉 이 ‘돈키호테’를 이해하려면 기존의 기사 소설을 알아야 됩니다.

그 다음에 ‘돈키호테’ 속편이 1615년에 10년 뒤에 발간이 되는데 그것은 또 ‘돈키호테’ 전편에 대한 이야기로 시작이 됩니다. 그러다가 속편이 총 74장으로 되어 있는데 59장에 가면 1615년에 ‘돈키호테’ 속편이 발간되기 전에 ‘돈키호테’ 전편이 너무나 인기가 있으니까 1614년에 아베아네다라는 사람이 필명으로 ‘돈키호테’ 속편을 발간을 합니다. 가짜인 것입니다. 거기에 대한 이야기가 ‘돈키호테’ 속편 세르반테스의 1615년에 또 이야기가 되고 있습니다. 그러니까 서로 텍스트가 영향을 주고 받고 다른 텍스트의 이해가 없이는 이 텍스트가 이해가 못 되는 그런 것을 상호 텍스트성이라고 그럽니다.

또 하나는 여러분들 현대에 들어서 최고의 인기를 누렸던 것이 중남미 소설입니다. 1960년 붐 소설이라고 들어보셨습니까? 마술적 사실주의라는 것입니다. 가브리엘 가르시아 마르케스의 ‘백년의 고독’ 즉 현실과 환상의 아주 모호한 경계, 죽은 사람이 나오고 그것이 현실과 같이 연계 돼서 이야기되는 그런 이야기들입니다.

그 다음에 또 독자 비평입니다. 이 ‘돈키호테’는 참 사실은 굉장히 어려운 텍스트입니다. 왜냐하면 독자들이 작가가 이야기 않는 바를 이해하기를 요구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니까 그냥 이게 패러디이기 때문에 겉으로는 굉장히 우습고 재미있는 책입니다. 그런데 그 안에 말하지 않은 것까지 읽어내도록 요구하고 있습니다. 독자비평입니다.

그 다음에 메타 픽션입니다. 이 작품 안에는 문학에 있어서 모든 장르에 대한 이야기가 들어가 있습니다. 문학이란 장르를 통해서 문학에 대한 이야기를 하기 때문에 메타 픽션이라고 합니다. 그리고 또한 작가의 죽음, 즉 여기는 또 작가가 앞으로 이야기가 나오겠지만 아주 여러 명이 등장을 합니다. 하여튼 이렇게 현대에 들어서 나타나는 문학 형식의 요소들이 벌써 1605년 ‘돈키호테’에서 다 싹트고 있다는 것을 보면서 로네 지라르는 ‘돈키호테’ 이후에 쓰여진 소설은 ‘돈키호테’를 다시 쓰는 것이나 아니면 그 일부를 쓰는 것이다. 대단한 이야기입니다.

세 번째, 대표적인 것만 제가 소개를 드립니다. 그 나머지 것들은 ‘돈키호테’가 여러분들한테 세 권이 발송이 되었습니다. 하나는 1605년의 작품이고 그 다음에 더 두꺼운 것은 1615년의 작품인데 그 사이에 낀 조그만 것은 그림을 가지고 ‘돈키호테’를 이야기를 해 놓은 것입니다. 그런데 2002년에 노르웨이 북 클럽이 세계 53개국 저명한 작가와 비평가들에게 순위는 매기지 말고 역사적으로 유명한 문학 작품 열 편씩을 선정해주기를 부탁을 했습니다. 그런데 받아 본 결과 독보적인 1위가 바로 ‘돈키호테’였습니다. 이 책에 보면 이렇게 적혀 있습니다. 국립중앙도서관 선정 고전 100, 동아일보 선정 세계를 움직인 100권의 책 또 영국, 미국, 호주에서 활동하는 작가 125명이 즐겨 읽는 문학 이것은 아무 것도 아닙니다. 지금 제가 말씀 드린 ‘돈키호테’가 바로 1위로 선정이 되었습니다. 대표적인 예를 설명을 드렸습니다.

그런데 아까 제가 말씀 드린 첫 번째 뮤지컬을 보여 드렸던 이유가 그러한 것이 다이지 않느냐? 그래서 그것 때문에 그런데 성공의 역설이라는 게 있습니다. 그 테마 하나가 유명해지니까 다른 것은 아무 것도 없는 것처럼 보여진다던가. 또는 그것을 가지고 사람들이 차용하고 변형을 하면서 원래 ‘돈키호테’의 모습이 또 없어집니다. 그래서 가끔은 정기적으로 이러한 강의가 있어야만이 ‘돈키호테’가 본래의 모습을 독자들에게 보여주지 않을까 라는 그런 생각을 해봅니다.

제가 동경에서 이렇게 길을 걷다가 ‘돈키호테’라는 상호 간판이 걸려 있는 것을 보고 아주 반가워서 뛰어가서 봤습니다. 봤더니 거기서 무엇을 파는 줄 아십니까? 혹시 가 보신 적이 있으십니까? ‘돈키호테’ 간판을 내 걸고 성인물을 팔고 있습니다. 그리고 지금 일본에서 또 유명한 돈키호테 돈 플라밍고라는 캐릭터가 있습니다. 애니메이션입니다. 그 사람은 아주 악당 중의 악당, 해적의 우두머리입니다. 그의 동생은 돈키호테 로시난테입니다. 로시난테가 누구인지 아십니까? 로시난테는 돈키호테의 말입니다. 그런 식으로 완전히 원래의 의미에서 너무나 이탈한 그런 현상들이 일어나고 있습니다. 물론 유명세 때문에 그런 것이겠습니다.

사르트르는 그런 이야기를 했습니다. 시대는 작가에게 최고의 선물이다. 또는 거꾸로 이야기한다면 하나의 작품을 본다면 그 시대가 보인다. 세르반테스는 1547년에서 1616까지 살았는데 그 시대의 스페인의 상황은 해가 지지 않는 대제국이었습니다. 지금 스페인이 경제 위기 때문에 여러분들 ‘PIGS’의 S, 돼지들 중의 한 마리로 꽁지 부분에 들어가 있기는 한데 스페인은 해가 지지 않는 대제국을 누렸던 나라였는데 그 때가 바로 까를로스 1세였습니다, 1516년에서 1556. 그 다음에 펠리페 21556년에서 1598 그 다음에 16세기를 이어서 영광의 그러니까 대제국이 딱 100년만 유지되었습니다. 너무나 짧은 기간 동안 그 영광을 누렸는데 그러한 이유도 이 작품을 보면서 이해가 되실 것입니다.

그 다음에 17세기 초반 그러니까 펠리페 31598년에서 1621년까지 여기 제가 극한 부침의 스페인을 몸으로 산 작가라고 했습니다. 국가 때문에 가져야 하는 종교이었기 때문입니다. 칼데론 데 라 바르카라고 스페인의 유명한 극작가가 있습니다. ‘인생은 꿈입니다’라는 것을 쓴 작가인데 그 작품은 제가 번역해서 우리나라에 소개되었습니다.

17세기에 아주 대표적인 작가인데 나의 의지가 아니라 국가 때문에 가져야 하는 종교라고 했습니다. 스페인은 전지전능한 종교 재판과 검열이라는 비인간적인 정치권의 압박으로 인간의 기본적인 자유조차 누릴 수 없었던 인간성 말살 시대였습니다. 태양이 지지 않는 대제국이라는 스페인에서 어떻게 이런 일이 있었을까요?

까를로스 1세 때는 스페인이 5대양 6대 주에 스페인 군인이 가 있지 않은 밟지 않은 땅이 없었고 스페인 배가 다니지 않는 바다가 없었습니다. 그리고 까를로스 1세는 그 당시에 유럽에서는 까를로스 5세였습니다. 찰스 5세였습니다. 다시 말해서 독일의 영토, 스페인 지금 현재 네덜란드, 벨기에 룩셈부르크 그 다음에 프랑스의 남부, 이태리 나폴리, 사르데니아 그리고 중남미까지 필리핀 그 모든 게 다 스페인 땅이었습니다. 그 영토를 유지하기 위해서 그 헤게모니아를 지기 위해서 스페인은 끝없이 전쟁을 치러야만 했습니다.

그런데 뭐가 문제가 되었느냐? 스페인에는 종교 재판소가 있었습니다. 종교 재판소는 유럽의 다른 나라도 있었습니다. 그런데 제일 처음 종교 재판소를 설치한 나라는 스페인입니다. 1478년에 교황한테 윤허를 얻어서 설치를 하게 되었는데 그 종교 재판소가 힘을 발휘하는 것이 1483년부터입니다. 1483년부터 1822년까지 스페인에는 종교 재판소가 있었습니다.

그 이유는 무엇일까요? 스페인은 유럽의 다른 나라와 달리 아랍인들이 711년부터 1492년까지 800년간을 지배합니다. 지금 세계에서 가장 관광 수입을 많이 올리는 나라가 스페인, 이태리, 미국, 프랑스 이렇게 되는데 이태리하고 스페인이 서로 1, 2위를 네가 1위니, 내가 1위니 싸우고 있습니다. 그만큼 스페인이 볼거리가 많다는 이야기입니다. 그런데 그 볼거리가 많은 것 중에 대부분이 아랍인들이 내려놓은 유물들입니다.

711년 아랍인들이 아프리카 북부로 해서 스페인으로 들어옵니다. 그런데 그 때 기존에 있던 기독교인들이 북쪽으로 쫓겨나갑니다. 쫓겨난 기독교인들이 다시 힘을 결집을 해 가지고 자기네 땅을 되찾는 즉 기독교인들의 땅으로 되찾게 되는 전쟁을 벌이게 되는데 그것이 국토 회복 전쟁입니다. 그 전쟁이 끝난 해가 1492년입니다. 여러분들 알함브라 궁전으로 유명한 그라나다 아십니까? 그라나다가 마지막 아랍 왕국이었습니다. 그것을 1492년에 점령함으로써 이베리아 반도 즉 스페인에서의 아랍의 역사는 종말을 고합니다. 아랍인들을 다 내쫓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아랍인들은 이슬람 교입니다. 그렇습니까? 스페인 땅에는 예루살렘이 망하면서 117년에서 138년에 스페인 땅으로 들어온 유대인들이 있었습니다. 117년에 들어왔습니다. 영토적으로 기독교 땅으로 통일을 했으니 이제는 정신적으로 통일을 해야 된다고 유대인들과 이슬람교도들을 맨 손으로 다 내쫓았습니다. 개종하지 않은 경우에 800년 동안 살아온 삶의 터전을 다 맨 몸으로 내쫓았습니다. 개종한 사람들은 스페인 땅에 남았습니다. 그러면 무슨 문제가 생깁니까? 그 다음부터는 그 개종이 진실한 것인지 진실하지 못한 것인지 감시하고 추적하는 그 기능을 바로 종교 재판소가 맡아 했습니다.

너무 아이러니한 게 종교 재판소의 첫 번째 종교 재판관이 바로 개종한 유대인입니다. 그리고 종교 재판소를 갖다 설치하기를 원했던 첫 번째 왕이 외가 측으로 유대인 집안입니다. 스페인 땅에 남은 사람은 개종한 유대인들이나 이슬람교도 아니면 순수 피의 기독교인들입니다. 그러니까 이제 스페인 땅에서는 ‘정말 너는 100% 순수한 기독교 피를 가진 사람이냐, 아니면 유대인이나 이슬람교의 피를 갖고 있는 사람이냐?’ 순혈주의가 문제가 되는 것입니다.

어느 나라는 피부색 때문에 광란의 역사를 가진 나라가 있습니다. 어느 나라입니까? 미국입니다. 지금도 가끔 그것 때문에 TV에 많이 뉴스거리가 되고 있습니다. 피부색은 눈에 보이기라도 합니다. 그런데 유대인들 피는 유대인 피 표가 납니까? 이슬람교도 피는 표가 납니까? 그런데 우리는 순수 더군다나 중간에 기독교 측에서 귀족인 사람들은 돈이 없었기 때문에 돈 많은 유대인들과 혼인을 하면서 다 합쳐졌습니다. 그런데 이제는 순수 피의 기독교인이냐, 아니면 그 피가 섞였느냐를 가지고 문제를 삼기 시작합니다.

이 종교 재판소가 제가 여기서 전지전능한 종교 재판소라고 그랬는데 종교 재판소가 설치된 이후 1822년에 사라질 때까지 종교 재판소에 회부된 사람들이 341,120명이었습니다. 그 중의 10%, 34,000명이 단지 의심 때문에 화형이나 참수형에 처해졌습니다. 종교 재판소는 변호가 없습니다. 일단 누군가의 고발을 받으면 그 때부터 고문입니다. 혹시 여러분들 ‘고야의 유령’이라는 영화를 보신 적 있으십니까? 우리나라에 소개되어 있습니다. 한번 보십시오. 그것은 고야, 18세기 말과 19세기 초에 일어났던 종교 재판소의 만행을 지금 이야기한 것입니다.

그런데 이 당시에는 특히 이어서 펠리페 2세 왕 때는 이 사람은 자기 아들조차도 이교도에 물들었다 그래서 감방에 넣은 왕입니다. 까를로스 1세는 유럽의 왕이었습니다. 그러나 그의 아들 펠리페 2세에게 독일 왕국은 자기 동생에게 물려주고 자기 아들에게는 스페인만 물려줬습니다. 그러면서 그 에너지를 전부 다 스페인에다 응축시키면서 더욱 더 종교적으로 광신도가 되었던 왕이 펠리페 2세입니다.

1571년에 여러분들 루터의 종교개혁을 아실 것입니다. 그 종교개혁에 반대한 반 종교개혁 운동을 펼치면서 그때까지 자기네들이 유지하던 가톨릭의 모든 의식들을 더 강조하면서 거기에 한 조항을 더 넣습니다. 금서 목록을 만들었습니다. 그래서 어떠한 책이든 검열이 없이는 출판되지 못하게 했고 ‘돈키호테’의 앞부분에 보면 검열한 사항들이 다 나옵니다. 그러니까 미풍양속을 해치지 않고 로마 가톨릭 교회의 어긋나는 이단적인 요소가 전혀 없다 라는 말이 이 검열에 다 들어갑니다. 그리고 또 정정에 대한 증명이라는 부분이 들어가는데 만일 검열에서 문제가 생기면 그것을 정정하도록 저자에게 다시 돌려줬습니다. 그래서 제대로 정정이 되었는지 그것을 검토한 다음에 출판을 허가했습니다. 이 책 하나만 봐도 ‘당시에 대단했구나’ 라고 느낄 수 있습니다.

그런데 이 책 안에는 그 당시에 사회, 종교, 정치에 대한 그리고 이 세르반테스의 너무나 개혁적인 혁신적인 혁명적인 사고가 다 들어가 있습니다. 그런데 출판이 되었을까요? 눈에 보이는 것이 다가 아닙니다. 여러분들이 그냥 자리에 앉으셔서 쉽게 읽으시는 게 그게 다가 아니다.

그러니까 이렇게 루터의 종교개혁에 맞서서 가톨릭을 수호하기 위한 그러니까 검열을 강화하면서 금서 목록을 만들어가지고 스페인 사람들이 조그마한 이교도 사상에 물들 수 있는 요인들을 다 제거했고 스페인 사람들이 외국에 나갈 때는 가톨릭을 고수하는 지역이나 대학으로만 유학을 보냈습니다.

그리고 그 당시까지 가톨릭에서 강조해오던 의식들, 성물에 대한 예배, 미사에 참여하는 것을 강조했습니다. 제가 유학하면서 겪은 스페인은 완전히 정교 일치입니다. 텍스트 안에 그런 표현이 있습니다. ‘십자가 뒤에 악마가 있다’. 속세적 욕망을 십자가라는 종교로서 앞을 가릴 때 이 속세적 욕망은 악마가 되는 것입니다. 정치가 종교에 기대고 종교가 정치의 등을 엎으면 그것은 악마가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정말 사실 성경에 대한 말씀을 모르고는 이 ‘돈키호테’를 이해하기 어렵습니다. 더군다나 유럽 문학은 기본적으로 두 가지를 알고 시작을 해야 합니다. 하나는 그리스 로마 신화입니다. 또 하나는 성경입니다. 성경을 모르고는 문학을 이해할 수 없습니다. 중세, 르네상스, 바로크 특히 그렇습니다. 현대에 들어서는 탈 신화가 이루어지기 때문에 신화를 알아야지 탈 신화된 상태를 알게 됩니다. 그것 또한 그렇습니다.

그런데 이러한 종교를 앞세워서 결국은 이 사람들이 했던 것이 마녀사냥이었습니다. 그런데 왜 마법사 사냥이라는 말은 없고 마녀사냥입니까? 다 여성들이었습니다. 힘 없는 여성들. 그러니까 종교 재판소가 진정한 종교를 내리기 위해서 만들어졌던 기관이 아니라 결국은 유대인들의 재산 강탈 그 다음에 국민들의 사상적, 사상의 통제, 자유 억압, 통치를 위한 획일화를 위한 하나의 도구였던 것입니다. 종교가 그렇게 사용되면 안됩니다. 종교는 종교의 의무를 다해야 되는데 가끔 그렇습니다.

그런데 개종한 유대인들은 개종을 해서 본인은 기독교인이 되었습니다. 그래서 ‘나도 기독교인처럼 하려고 해’ 하고 갔더니 기독교인들이 ‘당신은 우리 그룹에 들어오지 못한다. 네 피 속에는 유대인이 있다.’ 라고 합니다. 그러면 어디로 가야 됩니까? 어떻게 살아야 됩니까? 나는 이렇게 살고 싶은데 내가 살고자 하는 그룹 속에 들어가고자 하는데 이 그룹에서는 저를 받아주지 않습니다. 나는 그대들과 다름이 없는데.

그래서 이런 표현을 씁니다. 존재와 실재라는 이야기를 씁니다. 이렇게 살고 싶지만 그렇게 살 수 없어서 맞춰서 살아야 되는 존재, 자기 소외입니다. 여러분들 쉽게 이야기하면 이것입니다. 너무 어렵습니까? 나는 이렇게 살고 싶은데 할 수 없이 저렇게 살아야 될 때입니다. 여러분 상사한테 정말 한 주먹 내지르고 싶은데 목구멍을 생각하니까 그냥 비벼야 되고 쉽게 생각하면 그런 것입니다. 그것이 일상 생활화 되어 있다고 한번 생각해보십시오. 머리가 돌 것 같습니다. 더군다나 영민한 그리고 양심이 살아있는 그런 사람인 경우는 어떻겠습니까?

스페인이 이게 얼마나 부조리하느냐 하면 개종한 유대인, 유대인은 똑똑하다 라는 등식이 성립합니다. 지금 우리들도 그렇게 알고 있습니다. 그래서 똑똑한 지식을 가진 사람은 선대에서 유대인이었기 때문에 유대인이라는 오해를 받지 않기 위해서 똑똑한 직업을 아무도 안 가졌습니다. 스페인이 망한 이유를 아시겠습니까? 스페인의 기독교인들을 먹여 살렸던 사람들은 이슬람교도와 유대인들이었습니다. 스페인은 태양이 좋은 나라입니다. 그만큼 땅이 척박합니다. 건조합니다. 그러한 척박한 땅을 관개 기술로 아주 옥토로 만들어서 농업을 활성화시키고 그렇게 생산한 농산물들을 유대인들이 상업, 유통을 통해가지고 먹여 살린 게 기독교인들입니다.

그런데 이 두 부족을, 두 민족을, 두 종교 집단을 다 내쫓았습니다. 그러자 스페인 땅이 완전히 황무지로 변합니다. 그래서 농업은 없어지고 목축업이 되고 은행은 다 도산하고 재정은 다 엉망이 됩니다. 까를로스 1, 펠리페 2세 때는 스페인이 대제국이기 때문에 한 시도, 하루도 빠짐 없이 전쟁을 치러야만 했습니다. 그러려면 돈이 엄청나게 많이 듭니다. 그러면 어떻게 됩니까? 국가의 재정을, 금고를 담당하는 사람이 계산을 잘 해야 됩니다. 스페인에는 거대한 식민지가 있었습니다. 중남미에서 들어오는 금은보화가 있었습니다. 그런데 까를로스 1세 때는 그 금고지기가 개종한 유대인의 후손이라고 내쫓았습니다. 펠리페 2세 때는 그 금고지기 아버지의 직업이 염색공이었다고 직업이 있다고 내쫓았습니다. 그러면 순수 기독교인들은 누구냐. 농부들입니다. 그 사람들이 나라 경제를 어떻게 움직입니까? 그러니까 스페인에서는 왕실을 위한 사치품 이외에는 생산되는 물건이 아무 것도 없었습니다. 여러분들 나라의 부는 우리 제조업에 있다, 노동에 있다 그런 이야기를 합니다. 지나가면서 조금 더 이야기를 설명을 해 드리도록 하겠습니다.

그러면 세르반테스는 누구인가? 여러분들 책에 잘 설명이 되어 있습니다. 그러나 간단하게 넘어가겠습니다. 유년시절은 초라하고 궁핍했다. 정규 과정의 학문이 전무하다 라는 이 사실을 염두 해두십시오. 그리고 156922살 때는 미래의 이탈리아 추기경이 될 고급사제의 시종이자 수행원으로 이탈리아의 밀라노, 피렌체, 로마 등을 돌아다니며 인문주의의 지적 세계를 익히고 호흡합니다. 1571년에 레판토 해전에 참전을 해서 왼쪽 어깨에 총상을 입고 결국 왼팔을 못 쓰게 돼서 결국 ‘레판토의 외팔이’라는 별명이 듣게 됩니다. 그런 다음에 4년 동안 더 군 생활을 하게 됩니다.

그리고 1575년에 스페인으로 귀국 중에 터키 해적선의 습격을 받아서 포로가 됩니다. 이 작품에 보면 자유에 대해서 굉장히 많은 찬양을 하고 있는데 그 이유가 이런 데에서 나오는 것이라고 생각 될 수가 있을 것입니다. 그래서 알제입니다. 알제리는 나중에 국가로 나온 것이고 이 때는 알제입니다. 5년간 알제에서 노예 생활을 하는데 4번을 탈출을 시도하지만 다 실패를 하고 맙니다. 이 뒤에 그러니까 속편, 더 두꺼운 책 그 뒷부분에 보면 더 설명이 자세하게 되어 있으니까 참조해 주시기 바랍니다.

1580년에 이제 11년의 외지 생활 끝에 조국으로 돌아옵니다. 그리고 그 당시에는 중남미가 꿈의 대륙이었습니다. 스페인은 가톨릭이기 때문에 유산이니 이런 게 없고 아주 대가족입니다. 6형제, 여섯 남매인데 할아버지는 변호사였고 아버지는 외과 의사였습니다. 그런데 왜 이렇게 궁핍합니까? 의사와 변호사가 잘 살게 된 것은 근래의 이야기입니다. 이 당시에는 문맹률이 95%, 변호사는 문서, 글을 알고 남의 문서를 작성해주는 그런 수준이었고 의사는 스페인은 특히 이렇게 똑똑하면 유대인으로 되었기 때문에 의사 직업은 하는 일이 세 가지가 있었습니다. 치료하는 방법이 하나는 피를 뽑는 것, 두 번째는 땀을 흘리게 하는 것, 세 번째는 금식입니다. 그런데 피 뽑는 것은 그 당시에 이발사도 했습니다. 아랍인들이 10세기와 11세기에 스페인에 들어와 살았을 때는 유럽에서 최고의 문명 국가였습니다. 그 당시는 백내장 수술도 하고 뇌압을 낮추는 수술도 했습니다. 그런 나라였습니다. 그런데 어떻게 이렇게까지 입니까. 바로 편협적인 종교 정책 때문에 입니다.

자기 동생이랑 세르반테스가 동시에 포로로 잡혀갔기 때문에 신병 인수를 위한 즉 몸 값을 지불하기 위해서 가족들이 안 그래도 가난했는데 그나마 있는 재산들을 다 팔았기 때문에 굉장히 가족이 어려움에 처해 있었습니다. 그래서 중남미로 가기 위한 청원서를 두 번이나 내지만 두 번 다 ‘여기서 당신이 할 일을 찾으십시오’라는 대답만 듣게 됩니다.

그 다음에 1597년에 그 때부터 이제 무적 함대에 식량 조달하는 일을 하면서 그러니까 세금 징수원과 식량 조달을 위한 징발관 일을 맡게 됩니다. 그런데 교회의 밀을 징발했다는 일로 파문을 당합니다. 파문이라는 것은 종교가 모든 것을 지배하는 그 나라에서는 엄청난 명예 훼손입니다. 죽은 목숨과 같습니다. 처음에 1592년에는 또 당국의 허락 없이 밀을 팔았다는 죄목으로 투옥이 되었고 1597년에는 세금을 맡겨놓은 은행이 파산이 되어서 다시 세비야 감옥에 7개월간 투옥됩니다. 이 동안에 ‘돈키호테’가 잉태되었다고 그렇게 알려져 있습니다.

1604년에 ‘돈키호테’ 출판 허가를 얻고 1605년에 발간이 되는데 발간 되자마자 엄청난 인기를 누립니다. 그리고 이런 언어들로 번역이 되고 세계 역사상 최초의 베스트셀러가 ‘돈키호테’ 입니다.

1606년부터 속편을 준비한 것으로 보이고 1605년에 ‘기발한 기사 이달고 돈키호테 데 라 만차’ 이달고가 무엇인지는 다음에 설명을 할 것입니다. 그 다음에 1615년에는 ‘기발한 기사 돈키호테 데 라 만차’로 그리고 여덟 편의 희극과 막간극, 우리나라에는 소개는 되어 있지 않습니다. 1613년에는 ‘모범 소설집’ 그리고 이 때부터는 레모스 백작이 후원을 받은 것으로 되어 있습니다. 이때부터는 경제적 궁핍에서 벗어난 것으로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 다음에 1614년에 이렇게 작품들이 나오는데 아까 말씀 드렸던 익명의 아베야네다라는 필명으로 ‘돈키호테’ 속편이 등장합니다. 이런 현상은 스페인에서 굉장히 많이 일어나고 있습니다. 어느 작품이 인기를 누리면 익명의 작가가 제 2부를 씁니다. 그러니까 스페인 사람들은 이 저작권에 대한 이게 강하지가 않은가 봅니다. 물론 이 시대에는 그런 것도 없었겠지만 여하튼 하나의 작품이 공동작업으로 이루어진 것이 참 많습니다. 그리고 1616년에 42일 날에 병석에 눕고 그 다음에 422일 날 세상을 하직을 합니다. 그리고 1617년 유작으로 ‘페르실레스와 시히스문다의 고난’이라는 이 사람의 작품이 나옵니다.

이러한 돈키호테의 인생을 보면서 우리는 네 가지 의문을 갖게 됩니다. 첫 번째로 정규 과정의 학업을 거치지 않았는데 어떻게 ‘돈키호테’나 이후의 다른 작품에서 보여지는 것처럼 엄청난 지식을 보여주고 있는가? 거기에 대한 질문입니다. 그리고 하나는 이탈리아에서 지적이나 물적으로 하나도 부족함이 없었는데 왜 그 생활을 그만두고 군대에 자원 입대했는가? 그 다음에 세 번째, ‘돈키호테’가 엄청난 인기 아까 보셨습니다. 그런데 왜 세르반테스는 가난에서 벗어나지 못했는가? 그 다음에 네 번째는 왜 스페인의 영웅을, 나라를 위해서 몸을 바친 영웅을 중남미에 가려고 하는 것을 두 번이나 걸쳐서 반대를 했는가?

첫 번째, 독서입니다. ‘돈키호테’의 9장에 보면 자기는 길바닥에 떨어진 종이도 다 주워서 읽는 사람이라고 되어 있습니다. 그리고 4장에 보면 돈키호테가 책을 많이 읽어가지고 머리가 돌았기 때문에 그 친구인 신부, 이발사 그리고 그 집의 가정부 그리고 사촌 조카가 그 책을 화형식에 처하는데 그 화형을 치르기 전에 그 작품들에 대한 코멘트가 계속 나옵니다. 그러니까 그 작품들을 읽지 않고서는 쓸 수 없는 내용입니다. 그러니까 돈키호테가 엄청난 양의 책을 읽었다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학교 가서 수업 듣는 것보다도 독서하는 것이 얼마나 인생에서 중요한 것인지 그것을 보여주는 대목입니다.

그 다음에 이탈리아에서 지적이나 물적으로 아무런 어려움이 없었는데 왜 그만두었는가? 이것은 바로 젊은 시절 때 읽었던 엄청난 기사 소설의 영향을 받았다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 또한 모험을 하고 싶었을 것입니다. 왜냐하면 기사 소설에는 주로 가장 많이 다루는 테마가 뭐냐 하면 이슬람교도 특히 그러니까 터키인에게 맞서가지고 지중해를 지키기 위한 또는 콘스탄티노플을 갖다가 지키기 위한 기독교인들과의 싸움이 많이 나옵니다. 그러면 결국 기독교인들이 승리를 이루어서 콘스탄티노플의 황제가 되거나 아니면 그에 버금가는 중요한 직에 오른다 라고 작품이 끝납니다. 그래서 이 사람도 그와 같은 모험을 한번 해보고 싶었고 그 결과 자기도 어느 정도 출세할 수 있는 인물이 되지 않을까 하는 그러한 야망을 가졌을 수도 있었을 것입니다.

그 다음에 세 번째에 대한 질문은 출판 권한을 까스티아 지역에만 국한시켜 주었습니다. 다른 지역에서 해적판이 많이 발간이 되었습니다. , 저작권을 출판사에 넘겼습니다. 저도 이 책을 저작권을 출판사에 넘겼습니다. 이 책이 아무리 팔려도 저한테 오는 돈은 없습니다. 그런데 저는 29일 날 출판 기념회가 있는데 저는 가서 공짜 강의를 해 줍니다. 인생에 너무나 많이 도움이 될 것이니까 읽어보면 좋을 것 같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마지막에 왜 레판토의 영웅을 중남미에 간다는 세르반테스를 보내지 않았을까요? 당시 중남미로 보내지는 사람들은 중남미를 가톨릭에 물들이는 데에 방해되는 사람들은 보내지 않았습니다. 세르반테스가 가서 방해될 게 뭐가 있느냐? 세르반테스가 개종한 유대인입니다. 세르반테스가 사실은 이태리로 간 게 도망간 것입니다. 왕이 거처하고 있는 왕궁이나 아니면 궁터에서 싸움이 일어났을 때 무기를 꺼내면 안 되는데 그 법을 어겨서 세르반테스가 공개적인 벌에 처해짐과 동시에 오른쪽 손목이 잘리는 중형에 처해졌습니다. 그것을 피해서 도망간 것이 이태리입니다.

세르반테스 집안은 이달고 집안입니다. 이달고라는 것은 스페인에서 가장 하급 귀족, 작위를 이야기 합니다. 그러니까 순수 기독교인이면서 물질적으로 자산이 조금 있는 집안에게 주어지던 작위입니다. 그것을 증명하기 위한 이달기아라는 작위를 종교 재판소에 내밀었습니다. 그런데 그것조차 받아들이지가 않았습니다. 이달기아 작위는 나중에 돈으로 사고 팔 수 있는 물건까지 되었습니다. 여하튼 그 일 때문에 우리가 갖고 있는 네 가지 의문은 이렇게 해서 풀릴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러면 세르반테스가 어떻게 생겼는가 인물을 보면서 작품 분석으로 들어가겠습니다. 이 대목은 후안하루렉이라는 그 당시 시인이자 화가가 ‘돈키호테’의 저자인 세르반테스를 묘사한 글입니다. 그 당시는 카메라가 없었으니까 기록을 남길 수가 없었겠습니다. ‘갸름한 이마의 밤색 머리, 시원하게 틔워낸 이마에 명랑한 눈과 매부리코이지만 균형은 잘 잡혔다오. 20년 전만 해도 황금빛이었던 턱수염은 은빛으로 되었고 큼직한 콧수염을 갖고 있으며 입은 작은데 이빨은 크지도 작지도 않고 그나마 여섯 개 밖에 없다오. 이것들도 성치 않은데다 제자리에 제대로 나 있지 않아서 서로서로가 맞지 않는다오. 몸집은 두 극단 사이에 있어 크지도 작지도 않다오. 얼굴에는 혈기가 넘치는데 갈색이라기보다는 희며 등은 약간 굽어 발은 그리 잽싸지가 않다오. 이 자가 ‘라 갈라테아’와 ‘돈키호테 데 라 만차’ 작가의 얼굴이라오’.

이렇게 생겼습니다. 돈키호테와 많이 닮았습니다. 그 소리는 돈키호테를 세르반테스의 분신이라고까지 이야기 합니다. 입을 벌리고 있지 않아서 이빨이 어떻게 생겼는지는 모르겠습니다. 그 당시에 의료 수준이 이빨이 아프다고 그러면 무조건 뺐습니다. 그래서 이 당시에 유명한 시인이 한 이야기가 있습니다. 이빨이 아프다고 빼면 머리가 아프다고 머리를 잘라라. 그렇게 이야기를 하고 있습니다.

독서 안내를 해드리겠습니다. 이 ‘돈키호테’에 대한 평가의 다양성입니다. 너무나 극과 극을 오가고 있습니다. 케베도는 ‘돈키호테’ 이 작품을 두고 두려움과 경의를 표한다 라고 고백했습니다. 이 사람은 17세기에 대표적인 문인입니다. 그리고 정치에도 관여를 했던 사람입니다. 두려움과 경의를 표한다. 그런데 펠리페 3세는 자기 궁에서 창문 밖으로 이렇게 어떤 젊은이가 벤치에 앉아 가지고 배꼽을 잡고 깔깔 웃는 것입니다. 그 모습을 보고 뭐냐 하면 ‘저 놈은 아마 미쳤거나 아니면 ‘돈키호테’를 읽고 있는 것이다’ 그만큼 재미있다는 것입니다. 극과 극을 오갑니다.

잠깐 이 밑에 17세기와 18세기 스페인에서는 세르반테스 죽고 난 다음에 더 이상 ‘돈키호테’에 대한 또는 세르반테스에 대한 아무런 언급이 없었습니다. 이것은 또 무엇을 의미합니까? 스페인 역사상에서 이렇게 작가에 대해서 또는 그 작가의 작품에 대해서 완전한 침묵 속에 들어갔던 사람이 이 ‘돈키호테’의 세르반테스 그리고 또 한 사람이 있습니다. 혹시 여러분들 로르카라는 사람 들어보셨습니까? 페데리코 가르시아 로르카(Federico García Lorca). ‘피의 혼례’, ‘베르나르다 알바의 집’ 우리나라에 연극 다 공연 되었었습니다.

‘키호테의 성찰’을 쓴 오르테가 이 가세트입니다. 제가 박사 학위 논문이 이 사람에 대한 것입니다. 20세기 최고의 지성입니다. 이 사람은 ‘돈키호테’를 두고 ‘우롱하면서도 이렇게 겸허한’, 우롱하다. 비웃는 것입니다. 패러디 한 것입니다. 웃음입니다. ‘이렇게 겸허한 그러면서도 그토록 심오한 의미를 감추고 있는 작품이 세상에 다시 있을 수 있을까’.

이제는 세르반테스가 이야기하는 것을 한번 들어보겠습니다. 이 세르반테스가 어디에다가 이야기를 해 놨느냐? 이 작품 구성이 참 재미있는 것은 아까처럼 검열, 특허장, 정정에 대한 증명 다 하고 난 다음에 작품에 서문이 들어갑니다. 여러분 소설에 서문이 있다는 게 우습지 않습니까? 서문은 작품의 제일 앞에 나오지만 사실은 다 쓰고 난 다음에 쓰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 서문에 자기의 친구의 입을 빌려 가지고 이렇게 이야기 하고 있습니다. ‘자네 이야기를 읽으면’, 자네라는 것은 이제 세르반테스한테 하는 이야기입니다. ‘우울함이 웃음으로 바뀌고 웃음이 더 큰 웃음으로 바뀌며 어리석은 사람은 화를 내지 않고 신중한 사람은 그 기발한 착상에 감탄하고 심각한 사람은 경멸하지 않고 진중한 사람도 칭찬하도록 하라’. 어느 누가 그럽니다. 어느 영화를 보면 초등학생부터 어른까지 다 받는 메시지, 교훈이 있다고 합니다. 다 어느 층에 어느 나이에 관계없이 받아가는 메시지가 있습니다. 이것은 뭐냐 하면 관점이 다양합니다. 자기가 어떻게 보느냐에 따라서 다양하게 받아들일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여기서 이 대목에서 여러분들 이해가 안 되는 것이 ‘어리석은 사람은 화를 내지 않고’입니다. 여러분들이 어떤 예술 작품을 볼 때 화가 나시는 경우가 있으십니까? 예술론에 의하면 화가 나는 경우는 내가 그 작품을 이해하지 못할 때라고 합니다. 이해를 했을 때에는 좋다, 나쁘다 호불호가 분명히 갈려진다고 합니다. ‘저것은 마음에 드네’, ‘저것은 마음에 안 드네. 저런 게 다 있어’ 그런데 화가 날 때는 ‘도대체 저것 뭐야’ 이해를 못할 때라고 합니다. 그래서 여기서 어리석은 사람도 이해를 하는 작품이라는 이야기입니다.

그런데 또 작품 속편 3장에 보면 등장인물인 삼손 카라스코가 ‘돈키호테’ 전편에 대해서 평가하는 게 있습니다. ‘참으로 분명해서 이해하기 어려운 건 없습니다. 그래서 아이들은 손으로 갖고 놀고 젊은이들은 읽으며 어른들은 이해하며 노인들은 기린답니다’. 그런데 정작 세르반테스의 분신인 돈키호테는 ‘돈키호테’ 책 속에서 뭐라고 하느냐 하면, 속편 3장에서 뭐라고 이야기 하느냐 하면 ‘내 이야기를 이해하려면 설명이 필요해’라고 이야기 하고 있습니다. 이렇게 제가 설명을 해 드립니다.

우선 작품 구조를 보겠습니다. 간단하게 넘어가겠습니다. 책 출판 요건에 대해서 규정 가격, 정정에 대한 증명, 특허장, 헌사가 들어가고 서문이 나오고 작품에 붙이는 시입니다. 이 당시 관례가 어떤 작품이 출판이 되면 그 책에 붙이는 아주 칭송의 시가 앞에 유명한 사람들의 시가 쭉 붙습니다. 그런데 ‘돈키호테’는 작품에 붙이는 시가 기존 기사 소설에 나오는 등장인물들이 시를 씁니다.

그 이유는 이 당시에 같은 시대에 스페인에서 국민 극의 아버지라고 최고의 인기를 누렸던 로페 데 베가라는 사람이 있습니다. 이 사람은 죽고 난 다음에 국민장으로 7일장을 지낸 사람입니다. 대단한 인기를 누렸습니다. 그런데 이 사람이 뭐라고 썼느냐 하면 ‘세르반테스나 ‘돈키호테’를 칭찬하는 사람은 둘도 없는 바보다’라는 이 이야기를 써 가지고 다 유포시켰습니다. 그것은 자기를 욕하는 공고라는 시인이 어떤 험담 편지를 썼는데 그것을 세르반테스가 쓴 줄 알고 오해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할 수 없이 기존 기사 소설에 나오는 등장인물들이 ‘돈키호테’에 붙이는 시를 쓰는 것으로 작품을 구성하고 있습니다. 그 다음에 본문이 시작됩니다.

그래서 전편이 ‘기발한 이달고 돈키호테 데 라 만차’ 1605년에 총 52장으로 되어 있습니다. 두 번의 출정입니다. 모험을 나가고 두 번의 귀가입니다. 한번은 자기가 의도해서입니다. 왜냐하면 기사로서의 모든 것을 갖추기 위해서 귀가한 것이고 두 번째는 다른 사람의 의지로 인해서 마지못해 귀가한 것입니다. 그리고 난 다음에 1615년에는 ‘기발한 기사 돈키호테 데 라 만차’입니다. 앞에서 이달고에서 기사로 바뀌었습니다. 74장으로 되어 있습니다. 한 달 요양 후에 세 번째 출정과 귀가 그리고 주인공의 죽음으로 되어 있습니다.

작품의 목적을 서문에서 이렇게 밝히고 있습니다. ‘기사 소설을 공격하기 위한 것이다. 이 세상과 속인들 사이에서 기사 소설이 차고 넘치며 권위를 갖는 것을 무너뜨리기 위한 데 목적이 있다’. 그러니까 기사 소설의 권위를 실추시키기 위해서 패러디 하겠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 말에 모순이 있는데, 기사 소설은 중세에 탄생된 장르이고 15~16세기 후반에 이미 인기가 시들어져 버렸습니다. 17세기는 기사 소설에 대한 이야기가 없어졌습니다. 그런데 권위를 강등시키기 위해서 이 작품을 쓴다고 했습니다. 이게 무엇입니까? 하나의 위장술입니다.

그리고 작품의 작가는 제일 처음에 전편의 1장부터 8장까지는 라 만차 연감의 작가들이라고 나옵니다. 라 만차 그 지역의 역사를 쓴 작가들, 그 연감에서 자기가 그 이야기를 배운 것처럼 이야기를 합니다. 그런데 8장에서 이야기가 끊깁니다. 그런데 이 재미있는 이야기가 어떻게 더 연결되는지 궁금해서 톨레도에 있는 시장을 헤매다가 로시난테, 말 그림이 그려져 있는 원고를 발견하게 되는데 그 원고를 보니까 아랍어로 적혀져 있습니다. 그리고 작가가 시데 아메테 베넹헬리라는 아랍인 작가입니다. 그런데 이 원고를 주운 세르반테스는 아랍어를 모르니까 대신 스페인어를 아는 아랍인에게 원고를 번역을 시킵니다. 그러니까 번역자가 또 다른 작가가 되는 것입니다. 제가 이것을 번역을 했지만 세르반테스가 한 것 단 100% 완벽하게 되지는 못했을 것입니다. 그렇습니까? 제 문체라는 것도 있고 저의 성격이라는 것도 있고 그렇습니다. 그러니까 또 다른 세 번째 작가가 나타납니다.

그 다음에 세르반테스가 작품 속에 또 등장을 합니다. 세르반테스는 인물로서 등장을 하면서 이 아랍인이 쓴 원고에 대한 평을 합니다. 그리고 독자들을 초대합니다. 예를 든다면 ‘아랍인들은 거짓말을 잘 하는데 이 부분은 아무래도 거짓말인 것 같아’ 이렇게 하고 ‘번역한 사람이 이 부분은 실수한 것 같아’ 이렇게 이야기를 합니다. 그러면서 ‘독자 여러분들이 한번 생각해보십시오’ 또 이렇게 이야기합니다. 이상합니다. 여러분 읽으면 골치 아플 것 같습니다. 아닙니다. 일단은 재미있습니다. 읽으십시오.

그러면 어떤 식으로 패러디 했는가? 기존의 기사 소설을 중세 때 그렇게 인기를 누렸던 기사 소설을 패러디 했다는데 일단 어떤 식으로 이 작품은 우리에게 웃음을 주고 있는가? 일단 주인공을 봅시다. 기존의 기사 소설에서 주인공의 신분은 귀족의 자제입니다. 왕손입니다. 대부분은 왕자입니다. 그러니까 하이 엘리트 계급이고 그리고 모험을 하고 모험이라는 것이 그리고 괴물과 싸우고 그런데 그것을 다 무엇 때문에 합니까? 자기가 사랑하는 여인의 명예를 드높이기 위해서 그래서 그 모험들을 합니다. 그리고 어떤 아주 훌륭한 기사는 이 세상에 정말 소외된 자, 약한 자를 도와주고 정의를 내리겠다고 모험을 길을 떠납니다.

그런 기사인데 우리의 주인공 돈키호테는 어떤 기사인가 한번 보겠습니다. 첫 번째, 이달고입니다. 공작, 후작, 백작, 자작, 남작이라고 있는 공식적인 작위가 있습니다. 그런데 이달고는 그것이 아닌 스페인에만 있는 하급 귀족 작위입니다. 그 작위는 어디에서부터 시작되었느냐 하면 스페인의 가장 북쪽인 나바라는 지역이 있는데 그러니까 순수 기독교 집안의 재산도 어느 정도 갖고 있으면 그에게 주어졌던 작위가 이달고라는 작위입니다. 그런데 국토회복 전쟁이 일어나면서 공동의 대의에 참가한 사람들에게도 이러한 작위를 주었습니다. 그러니까 스페인 국민의 1/3이 대부분 다 이 작위를 가고 있습니다.

이 작위를 갖고 있는 사람의 특혜는 뭐냐 하면 세금을 안 내도 됩니다. 그러나 군사일과 행정일 이외에는 해서는 안됩니다. 웃깁니다. 그래서 이 사람들은 그러면 대부분 무엇을 하느냐? 위대한 모험과 꿈꾸는 자입니다. 라 만차 지역이 특히 그런 사람이 많습니다. 대범한 자, 경제에는 무관한 자, 모험을 좋아하는 자 이런 사람들이 이달고입니다.

그런데 작품 여러분들 1장을 보면 그냥 쉽게 읽고 지나갈 수 있지만 1장이 돈키호테의 일상 생활에 대한 이야기입니다. ‘얼마 전 라 만차의 그 이름이 잘 생각나지 않는 어느 한 마을에’ 이 사람은 장소도 분명하지 않습니다. 한 이달고가 살았는데 저녁으로는 무엇을 먹고 월요일마다 무엇을 먹느냐? 음식 이름이 나옵니다. 그런데 그 음식 먹는데 자기 재산의 3/4을 썼다고 합니다. 엥겔 지수가 높습니까? 엄청 높은 것입니다. 여러분들 배우셨습니다. 엥겔 지수가 높으면 무엇입니까? 가난하다. 1/4은 옷 입는데 썼다고 합니다. 그런데 스페인의 13세기에 알폰소 현왕이 만든 법전에 보면 가난한 자는 기사가 될 수 없습니다. 그런데 기사가 자기가 되겠다고 합니다. 가난합니다.

그 다음에 개종한 유대인입니다. 어떻게 하느냐 하면 여러분들 165페이지에 이 사람 여기 보면 토요일에는 베이컨 조각을 넣은 달걀 요리를 먹는다고 합니다. 아까 제가 종교 재판소 이야기를 했습니다. 종교 재판소에서는 개종 했지만 진정으로 개종했는가를 항상 감시하고 추적한다고 그랬습니다. 그래서 개종한 이슬람교도들이나 유대인들에게 토요일마다 이 음식을 먹도록 강요했습니다. 그래서 이 음식 이름이 스페인어로 두엘로스 이 케브란토스(duelos y quebrabntos)입니다. 음식 이름이 탄식과 고뇌입니다.

뼈까지 나는 유대인인데 나라 때문에 할 수 없이 내가 기독교로 개종을 했습니다. 그런데 유대인이나 이슬람교도들은 무엇을 안 먹습니까? 돼지고기 안 먹습니다. 베이컨이 돼지고기입니다. 어떻습니까? 먹으려면 탄식과 고뇌가 없이는 못 먹을 것입니다. 우리의 기사는 개종한 유대인입니다. 중세의 기사는 독실한 기독교인입니다. 유대인이 아닙니다. 또 틀립니다.

더군다나 이 사람은 너무나 기사도 소설을 많이 읽어서 머리가 돌았습니다. 광인입니다. 알폰소 현왕 법전에 보면 미친 사람은 기사가 될 수 없습니다. 그런데 더군다나 광인인데 기사 서임식을 받습니다. 제가 동영상을 준비했는데 기사 서품식을 받습니다. 그런데 그 법전에 뭐라고 되어 있느냐 하면 광인이 제 정신이 되었다 해도 장난으로 기사 서임식을 한번이라도 받은 사람은 절대로 기사가 될 수가 없다.

다시 말해서 세르반테스는 법전의 내용을 다 꿰뚫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리고 거기에 맞춰가지고 완전히 반 영웅인 우리의 기사를 만들고 있습니다. 패러디 하는 방법입니다.

기사 소설에 보면 항상 기사가 다쳤을 때 사용하는 향유가 나옵니다. 지금 기존 기사 소설에 대한 이야기를 드리고 있습니다. 대표적으로 이 ‘돈키호테’에서 언급되고 있는 향유는 피에브라스 향유입니다. 이 피에브라스 향유는 기존 기사 소설에 어떻게 서술이 나타나는 약이냐 하면 피에브라스라는 이슬람교도인 거인이 있는데 그 거인이 로마를 갖다가 공격해서 거기서 예수가 다쳤을 때 치료했던 약이 바로 피에브라스 향유라는 이름을 갖고 있습니다. 그러니까 그 약을 훔쳐와서 자기 이름을 붙였습니다. 그래서 피에브라스 향유입니다.

돈키호테가 몰매를 맞고 상처를 입고 돌아가면서 산초한테 그 이야기를 합니다. ‘나한테 이 향유가 있으면 내 몸이 이렇게 아프지 않을 텐데’ 그러니까 산초는 기사 세계에 대해서 전혀 모르니까 ‘그게 도대체 뭐래요?’ 합니다. 돈키호테가 이야기 합니다. ‘그 약만 있으면 내 몸이 두 동강이 나도 그 약만 하면 붙고 살아날 수 있어. 어떠한 고통도 그 약만 있으면 다 치료가 돼. 내가 그 약 제조법을 알지’. 산초가 뭐라고 그랬습니까? ‘주인님. 그 조제법을 알면 저를 알려주십시오. 제가 그것을 만들어서 팔면 이렇게 고생길을 같이 가지 않아도 되잖아요’ 라고 합니다. 이런 식으로 향유는 강등이 됩니다.

그리고 기존 기사 소설에는 그리고 기사와 공주 간의 사랑이 항상 나옵니다. 그런데 이 작품에서는 추하고 볼품없는 하녀를 돈키호테는 공주로 착각을 합니다. 기사 서임식 때에도 환상으로 해서 자기가 궁정에 있고 이러한 것처럼 입니다. 그 다음에 자기가 모신 공주도 사실은 옆 마을에 사는 알돈사 로렌소라고 촌부입니다. 이 여자에 대한 묘사가 작품에 나오는데 10리 길 떨어진 데에서도 이 여자가 고함을 치면 다 목소리가 들립니다. 그리고 창 던지기를 하면 그 동네에 있는 남정네보다도 더 멀리 던집니다. 그런데 돈키호테에게는 둘도 없는 아름다운, 이름이 둘시네아(Dulcinea)입니다. 둘시네아는 스페인어로 Dulce, ‘달콤한’이라는 뜻입니다. 그런데 둘시네아입니다. 돈키호테는 이제 본인이 자기에게 주어진 이름인데 이 작품에서 작가가 주인공한테 준 이름이 아닙니다. 등장인물인 주인공이 자기한테 준 이름이 돈키호테입니다.

이 돈키호테 ‘Don’이라는 것은 여러분들, 스페인에서 이름 앞에 붙는 경칭입니다. 여러분 세뇨리타라는 것 아십니다. 그것은 성 앞에 붙는 경칭입니다. 세뇨라, 세뇨르. 그런데 돈, 여자는 도냐입니다. 이름 앞에 붙는데 ‘Quixote’라는 것은 무슨 뜻이냐 하면 갑옷을 입었을 때 허벅지를 보호하는 그 부분을 ‘Quixote’라고 하면서 동시에 ‘남성의 상징이 결코 꺾이거나 풀어지지 않은 막강한 힘을 갖춘’ 그런 뜻입니다. 자기에게 그런 이름을 주는 것입니다. 이름을 짓는데 8일이나 걸립니다. 하여튼 그런데 기사와 공주 간의 사랑은 이런 식으로 강등을 시킵니다.

정리를 하면 이 작품은 기존 기사 소설의 권위를 실추시키기 위하여 기존 기사 소설에 나온 주인공이나 사건들을 놀림거리로 만듭니다. 이렇게 패러디를 하는 이유는 아까 제가 시대를 열심히 이야기 했던 게 여기서 나옵니다. 시대상황상 진실을 감추는 가면으로 많이 사용이 됩니다. 시대가 강요하던 양심에 맞서 작가의 양심을 표현하기 위한 하나의 책략이자 실제 의도를 숨기기 위한 위장술입니다. 그래서 주는 메시지가 뭐냐 하면 눈에 보이는 것이 다가 아니라는 진실입니다. 눈에 보이는 것이 다가 아니라는 진실은 작품 전체를 관통하고 있습니다. 직접적으로 에피소드로도 나오고 있습니다. 관점의 다양성에 대한 이야기들이 나옵니다.

숨은 코드입니다. 나는 내가 누구인지 알고 있다. 왜 광인인가. 왜 광인으로 설정을 했습니까? 그 다음에 왜 편력 기사로 설정을 했습니까? ‘나는 내가 누구인지를 알고 있다’는 것은 전편 5장에 돈키호테가 모험을 갔다가 톨레도 상인들한테 자기가 모시는 귀부인이 가장 아름답다고 고백을 하라고 했는데 그쪽에서 그것을 안 했습니다. 그러니까 ‘너와 그러면 결투를 벌여야 하겠노라’그러고 달려가다가 로시난테가 발을 접 지르는 바람에, 로시난테가 누구인지는 아십니까? 무엇인지는 아십니까? 말입니다. 접 지르는 바람에 실패를 하고 땅바닥에 나뒹굽니다. 그런데 누워서 계속 고함을 치고 있는 돈키호테가 못마땅한 톨레도 상인의 하인이 돈키호테를 무진장 두드려 팹니다. 돈키호테는 만날 망가지고 부셔지고 이빨이 빠지고 갈비뼈가 부러지고 이럽니다. 그런데도 ‘육체는 망가져도 정신은 날아보자’하고 만날 일어나는 사람입니다.

그래서 땅바닥에 누워 가지고 기사 소설에 나오는 대목을 읊조리고 있을 때 지나가는 사람이 고통에 힘들어하는 사람이 누구인가 해서 투구를 벗기고 보니까 알론소 키하노라는 자기 이웃인 것입니다. ‘키하노 님, 여기 웬일이세요’ 그럴 때 돈키호테가 하는 말입니다. ‘나는 내가 누구인지를 알고 있다. 나는 기존 기사 소설에 나오는 모든 기사들도 될 수 있다’.

그런데 사실 돈키호테는 압니다, 내가 누구인 줄을 안다는 게 얼마나 어려운 문제인지를. 왜냐하면 속편 42장에 드디어 산초가 섬을 통치하러 갑니다. 돈키호테가 자기의 종자로서 산초를 부릴 때 약속을 합니다. 내가 정복하는 섬의 성주를 시켜주겠노라고 입니다. 그런데 전편의 내용을 알고 있는 속편에 등장하는 공작 부부가 이 둘을 놀리기 위해서 산초에게 자기가 갖고 있는 땅을 통치하게 시킵니다. 그래서 산초가 그 섬을 통치하러 갑니다. 그 때 돈키호테가 그에게 주는 조언입니다. ‘자네가 어떤 인간인지를 알도록 노력하게. 이것은 세상에서 있을 수 있는 가장 어려운 지식일세’. 여러분들께서는 여러분들이 누구인 줄 아십니까?

밑에 그런데 돈키호테는 그럽니다. ‘나는 내가 누구인 줄을 알고 있다’ 왜냐하면 이 사람은 자기를 자기가 창조한 인물입니다. 아까 제가 작품 1장이 굉장히 중요하다고 그랬는데 거기에 보면 이 사람은 구체적으로 라 만차라는 지역만 있지 거기가 어디인지 장소가 언급되어 있지 않습니다. 이름조차도 연감에 따르면, 작가들에 따르면, 알론소 키하노인지 케사다인지 키하다인지 아주 분분하다고 이름이 정해져 있지 않습니다. 부모에 대한 언급도 없습니다. 그런 사람이 기사 소설을 너무 많이 읽어서 ‘내가 편력 기사가 되어야지’하고 자기에게 이름을 준 것이 돈키호테입니다.

이 사람이 돈키호테로서 편력 기사로 나가기 전에 인생에서 자기가 할 수 있는 가능성들이 나옵니다. 여기 보십시오. ‘키하다 또는 케사다라고 불렸다고 하는데’ 이름 지금 제가 말씀 드린 것입니다. 이 사람은 자기의 뜻과 신념에 따라 자기를 창조하는 인물입니다. 그러면 왜 내가 나의 창조자가 되어야 됩니까? ‘돈키호테’ 이 작품에서는 이야기 합니다. ‘사람은 저마다 자기 행위의 자식이니라’. 아까 전편이 ‘기발한 이달고’였는데 자기에게 돈키호테라는 이름을 주고 편력 기사로 나가서 기사의 모험을 한 다음에 결국은 그가 무엇이 되었습니까? 기사로 살았기 때문에 기사인 것입니다.

아리스토텔레스 그 옛날의 고전의 철학에서는 기능이 실존을 따른다 라고 되어 있습니다. 그런데 19세기 특히 칸트 이후에서는 실존이 기능을 따른다 라고 되어 있습니다. 이게 무슨 이야기이냐 하면 하이데거의 예를 든다면 망치는 왜 망치입니까? 망치질을 하니까 입니다. 제가 선생인 것은 제가 대학 교수인 것은 연구하고 학생들 가르치니까 교수입니다. 제가 만일 정치에다 한 발 들여다 놓고 그쪽만 구경하고 있으면 저는 교수가 아닙니다.

돈키호테는 자기가 기사가 되겠다고 했고 자기가 사람은 저마다 자기 행위의 자식이라고 했습니다. 여기서 나온 게 뭐냐 하면 사람은 가문이나 혈통으로 만들어진 것이 아니다. 내가 무엇을 하느냐에 따라서 나의 존재가 만들어지는 것이다. 전으로 돌아가면 자기를 안다는 것은 여러분들 내가 나를 안다는 것은 내가 누구인지를 아는 것입니다. 내가 누구인지를 안다는 사람은 내가 무엇을 원하는 지를 압니다. 그러면 내가 원하는 것을 하는 사람은 자기 자존감에 가득 차 있는 사람입니다. 그렇습니까? 남의 눈치를 볼 필요가 없습니다.

‘내가 누구인지 알아?’와 ‘내가 누구인지 알아.’ 단 하나의 차이입니다. ‘내가 누구인지 알아?’ 퀘스천 마크가 붙는 경우는 그것은 남에게 내가 인정을 받고 싶다는 욕구입니다. 헤겔은 사람의 인정 욕구가 역사를 이끌어온 동력이라고 그랬습니다. 하지만 인정 욕구는 자기가 갖고 있는 결핍에 대한 위로입니다. 남에게 인정을 받는 삶은 자기의 삶이 아닙니다. 내 스스로 내가 좋아서 내가 하는 일을 할 때 그것은 자기 자존감으로 가득 찬 삶은 결코 남의 인정을 얻으려고도 받으려고도 할 필요가 없습니다. 여러분도 여러분들 원하는 일 하고 계십니까? 한번 생각해보십시오.

저는 이 이야기가 제일 듣기 싫습니다. 조금 이상한 짓하고 우리가 상식 선에서 벗어나면서 별로 마음에 안 들면 ‘저 이는 돈키호테 같은 인간이야’ 아닙니다. 돈키호테는 여기에 있습니다. 내가 누구인지를 알고 있는 자는 자신의 길을 선택할 자유와 의지가 있는 존재라 믿고 미래지향적인 삶을 살아갑니다. 그래서 돈키호테는 이 작품에서 계속 그렇게 깨지고 뭉개지고 망가져도 또 일어납니다. 왜냐. 실패, 좌절을 모릅니다. 내가 좋아서, 내가 나를 만들어서, 내가 하고 싶은 것을 내가 하는데 부셔지는 것 내가 가는 길에 하나의 과정일 뿐이지 그게 결과는 아닙니다.

그러려면 어떻게 해야 됩니까? 기사 소설은 14~15세기 이야기인데 17세기 사는 인물입니다. 돈키호테를 빼 놓고 나머지 모든 사람들은, 환경은 이 사람을 전혀 이해하지를 못합니다. 그러면 어떻게 합니까? 믿음이 있어야 합니다. 여기 보십시오. ‘생각하고 된다고 믿고 있는 우리의 모험가는’ 믿고 있는 입니다.

이 사람은 우리 인생에서와 똑같이 여러 가지 가능성들이 있었습니다. 우리는, 인생은 매번 선택의 연속 선상에 있습니다. 이 사람도 기사 소설에서 이야기를 끝마치지 못하고 남겨진 이야기를 마저 쓸 수 있는 작가가 될 가능성이 있었고 그 때까지 살아온 무위도식적인 이달고의 삶을 계속하는 게 있었습니다. 그런데 자기는 자기가 읽고 심취했던 기사 소설 상의 인물로 살고 싶은 꿈을 가지게 됩니다. 그런데 환경은 그 사람을 이해를 못 합니다. 그러면 그 꿈을 이루려면 어떻게 해야 됩니까? 그렇게 믿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이 사람을 미치광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광인에 대한 이야기를 다시 해 드리겠습니다.

인생은 선택의 역사인데 기사가 되겠다는 선택을 했습니다. 그러니까 절대 믿음의 인물로 나옵니다. 톨레도 상인들에게 그 이야기를 합니다. ‘우리 둘시네아 공주가 제일 예쁘다고 고백을 해라’ 그러니까 상인들이 그럽니다. ‘야. 사진이라도 보여줘야지 우리가 말을 할 게 아니냐’ 그 때 돈키호테가 하는 말입니다. ‘보지 않고 하는 믿음이 진정한 믿음이다’. 그러고는 말 달리고 가다가 넘어져서 두드려 맞습니다. 아주 심각하고 절대 진리를 이야기하지만 그 다음은 아주 해프닝으로 끝납니다. 아주 중요한 대목은 빨리 넘어갑니다. 왜냐. 검열자의 눈을 피해서 검열에 안 걸리기 위해서 입니다. 검열에 걸리면 이런 내용은 완전히 화형에 처해지는 내용들입니다.

이 돈키호테가 인류를 위해 믿음과 사랑과 자유와 정의를 부르짖고 그 일을 실현하여 덕을 쌓아 윤리의 완벽성을 이루려 한다. 참 꿈이 거대합니다. 무엇입니까? 약한 자를 도와주고 소외된 자를 돕고 가난한 자를 돕고 사회의 불의를 타파해서 정의를 내세우는 것이 이 사람의 꿈입니다. 그런데 여러분들 이제는 함부로 돈키호테라는 말 쓰지 마십시오. 이러한 꿈을 가진 사람이 우리가 생각하지 않은 별 생각을 할 때 그 사람을 돈키호테라고 이야기 하십시오.

그런데 이 사람이 마지막 죽을 때 결국은 약속을 해서 그러니까 돈키호테를 계속 추적 하면서 돈키호테를 집으로 들어오게 만드는 부류가 있습니다. 돈키호테가 미쳤다며 이성의 편에 있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이 사람들이 뭐냐. 원대한 꿈을 모르는 사람들입니다. 이 사람이 신부고 이발사고 가정부고 아까 불에 책을 태웠다는 그런 사람들입니다. 결국은 삼손 카라스코가 기사로 분장을 해서 돈키호테에게 약속을 합니다. ‘네가 나랑 결투해서 만일 네가 지면 내 말을 들어라’ 옛날에 기사들이 그렇게 했습니다. 그래서 조건이 뭐냐고 하자 지면 집에 돌아가서 쉬라고 합니다.

그래서 결국은 싸움에서 져서 돈키호테가 집으로 돌아갑니다. 돌아가서 죽을 때 뭐라고 이야기 하느냐 하면 전에는 돈키호테 데 라 만차였지만 지금은 말한 바와 같이 선한 자 알론소 키하노이다. 왜냐면 기사로서의 일이 없었기 때문입니다. 기사로서 안하고 1년 동안 집에서 쉬기로 했습니다. 그래서 목동으로 1년을 살려고 계획을 하고 돌아갑니다. 그런데 이 목동의 일은 돈키호테가 하고 싶은 일이 아닙니다. 자기의 존재의 가치를 느끼지 못하는 일입니다. 삶의 무미건조함과 우울함에 빠져서 이 사람은 결국 죽습니다. 참 의미 있는 이야기입니다.

그러니까 돈키호테는 지금도 살아있습니다. 죽은 자는 알론소 키하노입니다. 죽는 그 순간에야 이 사람은 자기의 이름을 가집니다. 선한 자 알론소 키하노. 돈키호테가 더 이상 이제 기사가 아니니까 돈키호테가 아닙니다. 아까 그랬습니다. 기능이 실존을 만든다. ‘행동한다. 고로 존재한다’. 우리는 ‘생각한다. 고로 존재한다’고 했습니다. 하지만 아무리 많은 꿈을 가져도 그것을 행동으로 옮기지 않으면 아무 쓸모가 없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러한 생각이 자기만 갖는 게 아니라 주변도 변화시킵니다. 산초는 돈키호테가 정복하는 섬의 주인이 되겠다는 욕심 하나를 가지고, 그것도 그 사람의 꿈이었습니다. 쫓아갔습니다. 그런데 이 산초는 읽을 줄도 모르고 쓸 줄도 모르는 정말 무식한 사람이었습니다. 옛날 돼지치기했던 그런 사람입니다. 그런데 돈키호테랑 다니면서 성주가 되는 꿈을 꾸는 것을 보자 신부가 단순함에 놀라고 주인 못지 않은 망상에 빠졌다고 말합니다. 그래서 눈을 뜨고 있는데도 잠들어 있는 주인보다 더 심한 증상을 보인다. 다시 말해서 키호테 화가 됩니다. 나에게 역경으로 오는 환경은 나의 믿음과 의지로 이겨내되 나에게 도움을 주는 환경은 그 환경에 흡수되면서 나를 만들어 갈 수가 있는 것입니다.

이 책에 속담이 엄청 많이 나옵니다. 그 중에 ‘네가 누구랑 밥을 먹느냐? 네 친구가 누구인지를 나에게 이야기 해 달라. 그러면 내가 누구인 줄을 이야기하겠다’. 산초는 돈키호테랑 다니면서 돈키호테화 되었습니다. 돈키호테처럼 꿈을 꾸고 결국 성주가 되어서 너무나 훌륭하게 통치를 하고 마지막에 돈키호테가 죽어갈 때 머리맡에 앉아서 통곡을 합니다. ‘주인님, 다시 일어나세요. 우리 다시 모험의 길을 떠나야 되잖아요. 혹시 둘시네아 공주가 마법이 풀려서 우리를 기다리고 있는 줄 누가 알겠습니까?’ 전혀 그렇지 못했던 산초가 그렇게 된 것입니다.

그러면 왜 광기냐? 광기는 여기서 네 가지로 볼 수가 있습니다. 이렇게 네 가지입니다. 그런데 이 광기를 정리를 해보면 어쩔 수 없이 미친 광기와 자기가 좋아서 미친 사람 된 사람 중에 누가 더 미친 사람인지 물으니까 작품에 나오는 내용입니다. 할 수 없이 미친 사람은 언제까지나 미치광이일 것이고 좋아서 미치광이가 된 사람은 자기가 원할 때면 언제든지 그 미친 것을 그만둘 수 있다는 것입니다. 알겠습니까? 그러니까 돈키호테는 미친 게 아닙니다. 왜 미친 짓을 했느냐? 그 당시 검열에서 피하기 위해서 입니다. 요새도 법을 어기는 사람들이 정신이상자는 감옥을 안 보냅니다. 정신병원으로 보냅니다. 광인이 한 말은 모두가 다 권위를 잃습니다. 이것은 작품 속에 다 나옵니다.

그래서 돈키호테는 선택적인 광기, 자기 의지로 인한 광기입니다. 그래서 논리력이나 기억력에 의지하지 않는 마음 먹기에 따른 광기입니다. 그래서 사물을 파악하는 데는 아무런 영향을 주지 않습니다. 단지 외부 세계의 변형은 왜냐하면 이 사람이 거인이라고 싸운 게 풍차였습니다, 너무나 유명한. 그런데 이 사람은 기사 소설을 읽다가 머리가 돌았습니다.

기사 소설에서 거인을 이렇게 묘사하고 있습니다. 키가 장대만하고 팔이 네 개가 달렸습니다. 그리고는 마구 휘두릅니다. 길을 가다가 풍차를 보는 순간 키가 장대만하고 팔이 네 개입니다. 그런데 마침 바람이 불어서 팔이 막 움직입니다. 그러면 이 머리 속이 완전히 기사 코드화 되어 있는 사람의 눈을 통하는 순간 뭐가 됩니까, 그것은? 거인이 되는 것입니다. 그 외부 세계의 변형은 단지 기사 소설에 나오는 내용에 국한된 것일 뿐 그 나머지는 아닙니다. 그런데 1614년에 나온 아베야네다의 가짜 ‘돈키호테’는 진짜 미친 사람으로 나옵니다. 그래서 산초를 용으로도 보고 괴물로도 보고 현실을 왜곡을 합니다.

그러니까 여기서 두 가지만 딱 짚어 드리겠습니다. 우리가 사물을 보고 안다는 것은 우리가 알고 있는 것을 다시 확인하는 것뿐입니다. 물입니다. 우리가 머리 속에 물을 알고 있기 때문에 보면서 물이라고 압니다. 만일 우리 머리 속에 없는 것을 봤을 때는 우리가 뭐라고 그럽니까? ‘이게 뭐지?’ 그렇습니다. 즉 여러분들은 다 선입견으로 산다는 것입니다. 여러분들의 관념 속에서 모든 것을 다 이해를 하는 것입니다. 아까 제가 이야기 드린 관점의 다양화입니다.

예를 든다면 땅이 있습니다. 지질학자에게 땅과 천문학자에게 땅과 농부에게 땅이 어떤 존재로 나옵니까? 지질학자에게 있어서 땅은 그 성분이 무엇으로 되어 있고 구조가 어떻게 되어 있고 그 다음에 그 땅이 형성된 역사가 어떤 것인가로 보일 것입니다. 천문학자에게는 우주 전체에서 또 하나의 작은 행성 또는 다른 천체와의 관계에서 땅을 볼 것입니다. 농부에게 있어서 땅은 무엇입니까? 생명이 꿈틀거리는 흙으로서 볼 것입니다. 부동산업자에게 땅은 돈으로 보이겠습니다.

자기 머리 속에 뭐가 있느냐에 따라서 사물을 파악하는 데 차이가 있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여러분들 남을 판단할 때 이것 굉장히 조심해야 됩니다, 그러니까 편견이라는 것. 우리는 선입견에 삽니다. 그래서 우리는 다른 사람을 봐야 되고 그 모든 다른 사람을 만날 수 있고 그 모든 것을 경험할 수 없기 때문에 그래서 우리는 무엇을 합니까? 독서를 하는 것입니다. 여러분들 독서 클럽입니다. 정말 좋은 클럽인 것 같습니다, 이런 것도 보시고.

그리고 마지막에 돈키호테가 죽고 난 다음에 묘비명에 뭐라고 적히냐 하면 이렇게 적습니다. ‘미쳐 살다 정신 들어 죽다. 죽음도 그의 죽음을 이기지 못했노라’ 여러분들 미쳐보신 적 있으십니까? 우리의 돈키호테는 기사 소설에 미쳤습니다. 그래서 기사 소설을 몸소 실천하려고 했고 그 이상은 정의를 내리고 약한 자를 도와주는 것이었습니다. 여러분들께서는 어디에 미쳐보셨습니까? ‘내가 젊을 때 한 때는 이것 잘 했지. 내가 한번 클래식 음악에 미친 적 있지. 내가 한번은 그 여자 때문에 죽는 줄 알았어’. 없으십니까? 그런 시 있습니다. ‘연탄재 함부로 발로 차지 마라. 너는 언제 연탄처럼 뜨거운 적이 있었던가’.

우리의 삶이라는 게 뭐냐. 손바닥 논리, 이성에만 사로 잡혀서 이것은 안돼. 저것도 안돼. 이것이 우리의 삶이냐? 아니면 내가 좋아하는 것을 정말 마음껏 해볼 수 있는 게 우리의 삶이냐. 미쳐 산다는 것은 바로 이것을 이야기 합니다. 논리의 반대편, 이성의 반대편입니다. 죽음도 그 사람을 이기지 못했습니다. 죽었지만 돈키호테는 사라졌지만 지금 우리는 그 돈키호테를 이야기 하고 있습니다.

그러니까 돈키호테의 광기는 ‘말을 들었던 사람들은 새삼 무슨 문제를 다루더라도 훌륭한 이해력과 사고력을 갖고 있는 사람이 고생만 하고 불행하고 시커멓기만 한 기사도 이야기만 나오면 어김없이 이해력도 사고력도 잃어버리는 게 안됐다고 생각했다’. 바로 이게 돈키호테의 광기가 이런 성질입니다. 아셨습니까? 정말 미치면 정신병원 가야 됩니다.

편력 기사는 똑같습니다. 광기를 구속에서 해방되는 요인으로 사용을 했습니다. 편력 기사는 중세 때 편력 기사가 아닙니다. 왜냐하면 중세 때 편력 기사는 따라야 할 법이 있고 지켜야 할 규정이 있고 섬겨야 할 왕이 있고 모셔야 할 종교가 있었습니다. 그러나 이 사람들은 어디든 돌아다니면서 무엇을 했습니까? 약한 자를 도와주고 정의를 내리는 그러니까 자기가 선택을 한 것입니다. 어디든 돌아갈 수 있는 그러니까 구속을 당하지 않고 어디든 돌아갈 수 있는 그 면과 약한 자를 도와주고 정의를 내리는 그 면만 차용을 했습니다. 편력 기사 외에 다른 것을 한번 생각해보겠습니다. 해적은 바다에 국한됩니다. . 권력이고 국가가 필요합니다. 편력 기사는 그런 것 아무 것도 없이 많은 사람을 만나면서 구속에서 풀려나서 자기가 하고 싶은 것을 할 수가 있습니다.

그래서 이 작품에 또 다른 인물이 나오는데 속편에 나옵니다. 산적 로케 기나르트라는 사람이 나옵니다. 산적입니다. 이 사람에게 돈키호테는 영혼의 친밀감을 느낍니다. 이 사람이 어떤 사람이냐 하면 밑에 것을 보십시오. ‘소외되고 가난한 자들을 돕고 정의를 실현하기 위해 길을 나선 돈키호테, 자비에 근거하던 대범함에 근거하던 여하튼 건강한 사회의 필수요건인 재산의 균등한 분배의 정의를 실현한 산적 로케 기나르트’입니다. 남에게 뺏기는 하지만 그것을 어느 누구도 억울하지 않게 없는 자에게 더 주고 옛날 홍길동을 생각합니다. 그래서 돈키호테는 그 많은 사람을 만나지만 나와 함께 편력 기사를 가자고 유일하게 초대하는 사람이 로케 기나르트입니다.

이렇게 개인이 편력 기사나 아니면 산적으로서 사회 정의를 내리겠다고 할 때는 그 나라가 나라로서의 기능을 제대로 하지 못 할 때입니다. 사법 체계가 올바로 정립되어서 그것을 제대로 실행에 옮기지 못할 때입니다. 바로 스페인이 이 시대가 그랬습니다, 정교 일치로 인해서. 아까 제가 사회적 면을 강조해서 말씀 드렸던 것은 바로 이것 때문입니다.

그 다음에 이 작품은 모방에서 창조인데 아까 기존 기사 소설에서 사랑하는 여인에 대한 이야기를 했고 그 다음에 모험을 이야기를 했습니다. 거인과의 싸움입니다. 괴물과의 싸움입니다. 그러면 ‘돈키호테’에서는 누구랑 싸우느냐? 뭐와 싸우겠습니까? 일단 모방을 합니다. 모방의 미학은 플라톤의 대화 플루타르코스 편에 봐도 예술의 완벽성을 이루려면 모방을 해라 라고 나옵니다. 그리고 우리 여러분 아리스토텔레스의 미학론도 모방론입니다. 그 다음에 이게 다 문예 부흥기 작품에 들어갑니다.

그러니까 어느 화가가 자기 예술로 유명해지고 싶으면 자기가 알고 있는 가장 뛰어난 작가의 작품을 모방해야 된다. 그러므로 산초입니다. 나도 편력 기사로서 그들처럼 그렇게 글을 아마디스, 아마디스 데 가울라는 유명한 기사 소설이고 돈키호테가 즉, 세르반테스가 가장 많이 읽었던 작품입니다. 아마디스를 더 모방하면 할수록 더욱 더 기사에 완벽성을 이루는 것이다.

그래서 모방을 하는데 ‘아마디스가 하는 일이 내 기억 속에 되살아나 어디서부터 내가 너희들을 흉내내야 될지 가르쳐다오. 그런데 그가 가장 많이 한 일은 기도하며 하느님의 가호를 청한 것인데 묵주가 없어서 어떻게 한다지? 이때 묵주를 만들 방법이 생각이 났다. 축 늘어진 셔츠 자락을 널찍하게 찢어 매듭을 열한 개 만들고 그 중 한 개는 좀 더 굵게 만드는 것이었다. 이것을 그는 산에 있는 동안 묵주로 사용했는데, 이것으로 성모송을 1백 만 번이나 드렸다’. 그런데 이 부분을 ‘돈키호테’ 제 2판을 찍을 때 인쇄업자 후안 데 라 쿠에스타는 이 부분을 이렇게 바꾸었습니다. ‘코르크나무에 있는 큰 마디 열 개를 줄줄이 꿰어 묵주로 사용했다’.

여러분들 옛날에 남성들이 입었던 속옷이 여기까지 옵니다. 궁둥이를 덮습니다. 그 당시에 그렇게 위생적으로 지금처럼 비데가 있거나 그렇지 않습니다. 더군다나 편력 기사가 돌아다니면서 어디 가서 목욕을 하겠습니까? 얼마나 지저분 하겠습니까?

여러분들 성경에 보면 레위기에 보면 유출병이라는 게 있습니다. 사랑하는 여인을 생각하면서 자기도 모르게 정자가 흘러나오는 것을 유출병이라고 그럽니다. 유출병은 어떻고 어떻고 엄청난 죄악으로 쭉 설명이 되어 있습니다. 제가 성경을 모르면 이해가 어렵다는 게 이런 데에서 바로 알 수가 있습니다. 그러니까 그 자락이 얼마나 지저분한 것인지 말입니다. 그런데 그 자락을 찢어가지고 묵주를 만들었다고 합니다.

아마디스를 모방해서 산에 고행하러 들어갔습니다. 그런데 아마디스는 자기 고행하러 들어갈 때 옆에 은자를 대동합니다. 그래서 그 사람에게 회개도 하고 그 사람과 같이 미사도 드리고 기도도 합니다. 그런데 자기는 은자가 없습니다. 대신에 묵주를 만듭니다. 그 묵주를 무엇으로 만듭니까? 찢어진 셔츠입니다.

결국 무엇에 대한 비판입니까? 교회의 성물에 대한 비판입니다. 이 당시에 가톨릭이 카를로스 1세 때 비서를 지냈던 사람이 쓴 작품에 ‘로마에서 일어난 일들’이라는 책이 있습니다. 그 책에 보면 이런 이야기가 있습니다. ‘나는 예수가 못 박혔다는 십자가를 로마에서만해도 5만 개 더 이상을 봤고 성모마리아 이빨을 5백 개 더 이상을 봤고 성모마리아가 입었던 스커트 자락, 치마를 나는 6백 벌이나 더 봤다’ 이것은 무엇을 이야기합니까? 종교가 종교 본연의 모습이 아니라 성물에다가 헌신을 드린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종교개혁이 왜 일어났습니까? 면죄부 팔고 너무나 의식이 형식으로만 흐르는 거기에 반대해서 일어난 것입니다. 가톨릭은 이랬습니다. 종교개혁에 반대하는 반 종교개혁을 열면서 스페인에서는 특히 더 이 성물에 대한 예배가 도를 지나쳤습니다. 거기에 대한 반대를 대놓고 말할 수가 없습니다. 이런 식으로 넘어가는 것입니다. 여러분들 읽으시면서 그냥 가시겠습니다. 그런데 이 남자가 셔츠, 위에서 아래까지 하얗게 엉덩이를 다 덮는 그런 옷으로 묵주를 만들어서 성모경을 101번을 드렸다고 합니다. 성물에 대한 불경이 도를 넘는 것입니다.

그 다음에 스페인 이 작품에서 굉장히 중요한 게 나오는 게 이 갤리선의 죄수를 갖다가 풀어주는 것입니다. 앞의 것은 이런 식으로 넘어갈 수 있었지만 뒤 부분이 이 사건은 돈키호테가 정말 화형에도 처해질 수 있는 사건입니다. 갤리선에 노예는 벌을 받아서 그 벌을 집행하러 가는 것입니다. 갤리선이 뭐냐 하면 노예선, 혹시 ‘아미스타드’라는 영화를 보셨습니까? 거기 보면 배를 지금처럼 기름이 있어서, 석탄을 태워서 배를 움직이는 게 아니라 사람이 저어서 배를 움직였습니다. 그 노역형에 처해지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제대로 못하면 뒤에서 채찍으로 마구 때립니다.

그런데 이 당시는 죄를 지으면 일단 공개적으로 벌을 받는 벌이 있고 두 번째는 공개적인 벌이라는 게 사람을 앞세우고 웃통을 벗고 뒤에서 채찍질을 해가면서 그 죄인 앞에서는 이 사람은 어떤 죄를 지어서 어떤 벌을 받는다고 동네방네 알립니다. 그 다음에 태형, 뒤에 등 짝에 채찍에 100, 200대입니다. 세르반테스가 포로로 잡혔을 때는 2천 대까지 형을 받았지만 그것은 비인간적이라고 물렸습니다, 여하튼. 그리고 갤리선에서 3, 6, 10년 노만 젓습니다.

그런데 이런 사람들을 봅니다. 지금 읽으셨습니다, 제가 이야기 할 동안에. 그래서 돈키호테가 가서 보니까 아니 무슨 죄를 지었길래 저렇게 목에다 팔목에다 발목에다 쇠사슬 묶고 끌고 가는지 가서 물어봅니다. ‘너는 무슨 죄를 지었느냐’ 그런데 자기가 들어보니까 지은 죄에 대해서 벌이 너무나 가혹합니다. 예를 든다면 빨래를 훔쳤습니다. 그런데 태형 100대에 갤리형 3년 형입니다. 사랑을 했습니다. 200대에 6년입니다. 포주입니다. 그런데 마법사라는 누명까지 써 가지고 10년 형을 받습니다.

그러니까 이 사람들을 어떻게 합니까? 돈키호테가 들어보니까 걔네 들이 지은 죄에 비해서 벌이 너무 과하다고 이 사람들을 풀어줍니다. 그때 산초가 그럽니다. ‘왕 자체가 법인데’ 입니다. 이 사람들은 왕의 노예로서 배에 노 저으러 가는 것입니다. 이 당시에는 싸움이 많았기 때문에 참 이런 사람들이 많이 필요했습니다. 왕에 대항해서 일어난 것입니다.

밑에 뒤에 보면 ‘하느님과 자연이 자유롭게 한 자를 노예로 하는 것은 무자비한 행위로 여겨진다’ 참 이 사람이 인류애적입니다. 하느님과 자연의 인간에 대한 존엄성. 자유에 대해서 굉장히 많은 언급이 나오는데 우리 인간은 자유를 얻기 위해서 부단히 싸웠습니다. 그러면서 동시에 사람들은 왜 자기 스스로를 구속하지 못해서 야단인지 모르겠습니다. 여러분들 그렇지 않습니까? 어디 소속에 들어가 있지 않으면 불안하지 않으십니까? 그런데 우리는 자유를, 우리 프랑스 혁명 모토가 무엇입니까? 평등, 자유, 박애입니다. 자유입니다. 하느님과 자연이 자유롭게 한 자를 노예로 한다는 것은 무자비한 행위로 여겨진다.

각자 저지른 죄는 저 세상에서 벌을 받으면 되는 것이오. 악한 자를 벌주시고 착한 자를 상주시는 데 왜 인간이 인간에게 벌을 줍니까. 더군다나 그들이 지은 죄에 비해서 벌이 너무나 가혹합니다. 그래서 고야가 1810에서 1820년 동안에 포로라는 etching, 동판화를 만드는데 그게 뭐냐 하면 범죄만큼이나 야만적인 법을 이야기를 했습니다. 그런데 세르반테스는 무엇을 이야기합니까? 범죄보다도 더 야만적인 법을 이야기합니다. 이와 함께 여러분의 의사에 반하여 자기의 삶에 가해지는 가장 막강한 종교와 국가의 간섭에 관한 비난입니다. 그러면서 동시에 가혹한 사법 체제와 형벌 제도에 대한 비판입니다. 이런 것을 여러분들 읽으면서 다 읽어내셔야 됩니다.

그리고 하나는 문학의 기능에서 중요한 것은 이것입니다. ‘영혼에서 싹튼 생각이 정결하면 작품 또한 그렇게 될 것이오. 펜은 영혼의 혀라오’ 문학 작품은 이렇게 써야만이 어떻게 해야 된다 입니까? 일반적인 악습을 비난하고 그 다음은 칭찬해줘라. 문학의 기능은 입니다. 그러면서 어떤 사람이 써야 되는가에 대해서 여기서 이야기를 하고 있습니다.

그러면 돈키호테가 꿈꾸는 존재와 사회는 무엇이냐? 두 가지입니다. 하나는 우리 의식의 개조입니다. 소유 지향적인 삶이 아니라 존재 지향적인 삶을 살아라. 권력을 더 갖고자 돈을 더 갖고자 살지 말고 그것은 끝이 없습니다. 인간의 욕심은 한이 없습니다. 그렇습니까? 무엇을 바꿔야 됩니까? 환경이 바뀌지 않으면 내가 바뀌어야 된다.

아까 제가 믿음이라고 이야기를 했는데 인간의 두뇌는 굉장히 단순합니다. 서너 번만 ‘나는 행복하다’ 반복하면 행복해지고 ‘나 지금 맛있는 것 먹었어. 정말 맛있네’ 그러면 입에서 침이 나오고 위에서 소화액이 나온다고 합니다. 그러한 믿음을 갖고 내 의지로서 여러분들이 살고 싶은 삶을 사십시오. 그러면 ‘내가 누구인지 알아?’ 라는 말이 안 나옵니다. 남한테 인정받을 필요가 없습니다. 내가 좋아하면 최선을 다하게 될 것이고 그러면 실패라는 의식이 없습니다.

사실 제가 ‘돈키호테’를 내면서 이 ‘돈키호테’가 지금 스페인어 판에서 완전히 번역된 것은 딱 한 종이 있습니다. 그런데 우리나라에서는 이것을 많이 따집니다. 이것이 최초 번역입니까? 그러니까 ‘선전을 해야 되는데 뭐로 선전할 게 없네요’ 이러더니 그 쪽에서 다 보더니 한다는 말이 ‘아, 돈키호테 번역의 결정판’ 이렇게 이야기를 합니다. 제가 만일 처음에 그렇게 의미를 갖지 못하는 책이라면 제가 이 고생을 왜 했습니까? 제가 번역 후기를 오늘 가셔서 보십시오.

존재 지향적인 삶, 제가 이 번역할 때 참 힘들었습니다. 허벅지에 땀띠도 나고 강의하면서 애 키우고 남편 봉양하고 부모님, 시 부모님 다 챙기고 모두들 그러시겠지만 아주 슈퍼우먼입니다. 그 결과 눈을 엄청 망쳤습니다. 책이 아주 두꺼운데 목 디스크가 올까 봐 노트북을 가지고 작업을 했습니다. 그랬더니 눈을 망쳐서 하루에 세 가지 약을 씁니다. 안경도 안 끼는데 끼게 되었습니다.

그러니까 뭔가를 얻고자 하면 잃는 게 있습니다. 그것은 어떻게 할 수가 없습니다. 하지만 저는 이게 ‘힘들다. 그만 두어야지’가 아니라 ‘돈키호테만은 내가 제대로 번역해야지’입니다. 내가 삼십 몇 년 동안 스페인 문학, 저는 대학도 좋아서 갔습니다. 제가 쓴 책에 ‘왜 스페인은 끌리는가’라는 책이 있습니다. 그 앞 부분에 저의 이력이 조금 나옵니다. 저는 원래 미술이 좋아서 미술을 하고 싶었습니다. 또 사진에 미친 적도 있었고 제가 또 여학생 테니스 챔피언입니다. 100m 달리기를 14초에 뜁니다. 사진 전시회도 했었고 지금도 시간이 나면 미술도 합니다. 그리고 문예 경진 대회 같은 데 나가면 시를 쓰든 무엇을 하든 적어도 차상은 받았습니다. 저희 어머니 말씀으로는 너처럼 팔방미인이 어디 있느냐?

그런데 제가 정말 처음에 원했던 것은 미술이었지만 스페인 문학이 좋아서 스페인이 좋아서 그런데 한국에서 저의 갈증을 메워주는 데가 하나도 없는 것입니다. 그래서 제가 스페인 대사관에 가서 스페인 정부랑 이야기를 해서 장학금을 받아 놓고 아버지께 드렸습니다. 저 때가 1982년입니다. ‘아빠. 저 스페인 유학갈래요’ 그 때는 스페인이 어디 있는지도 모를 때입니다. 저는 초등학교를 일찍 들어갔습니다. 그러니까 나이가 24살 밖에 안 된 딸이 와서 ‘아빠. 저 스페인 유학갈래요. 장학금 여기 있어요’ 저희 아버지도 교수십니다. 미국에서 아버지께서는 유학을 하셨습니다. 그래서 그것을 이해 해 주신 것 같습니다.

그런데 그렇게 좋아서 스페인을 정말 공부를 하고 왔는데 한국의 학교에서 스페인에 대한 인식은 너무 낮은 것입니다. 수업도 학점 잘 나오는 수업만 들어가고 제가 중세 문학을 스페인에서 배운 것처럼 가르쳤더니 수업 학생 수가 여섯 명으로 줄었습니다. 최저 학생 수가 7명인데 폐강입니다. 선생을 선생답게 만드는 것은 학생인 것 같습니다.

제가 스페인 다 쫓아다니면서 다 했습니다. 실제 장소까지 고증까지 해 가면서 입니다. 거기 있는 사람들도 이미 쓰지 않는 표현들도 많이 나옵니다. 거기에 가서 직접 사람들한테 물어보고 그 지역 주민들한테 이 음식은 어떤 음식인지 물어보면서 그리고 가독성을 높여야 되니까 돈키호테는 만연체 문장, 17세기 초반의 문장입니다. 그러니까 그 문장을 여러분들 현대에 읽게끔 다 고쳐가면서 연구년을 몽땅 여기다 다 부어서 5년간을 번역을 했고 교정을 봤고 매년 마다 제가 스페인을 가는데 스페인 호텔에서 제 원본은 완전히 너덜너덜 다 떨어졌습니다. 사전이 세 개가 다 나갔습니다. 존재 지향적인 삶을 사니까 참 뿌듯합니다. 안 알아줘도 좋습니다.

그 다음에 사회 구조의 개혁입니다. 이 사람은 소유가 아니라 공유의 삶입니다. 그 다음에 국가의 의무, 정치가 정치다운 모습을 종교가 종교다운 모습을 보이는 정의로운 사회 실현이 이 사람의 꿈입니다. 그래서 이 대목이 나옵니다. 옛날에는 여기에 공유의 삶을 이야기 하고 있습니다. 그 다음에 정의로운 삶을 지금 여기서 이야기 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산초의 바라타리아 섬 통치에 대해서는 돌아가서 읽으십시오. 여기서는 무엇을 이야기 하고 있느냐 하면 정교 일치에 대해서 반대를 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또 하나는 완전한 이 시대의 유토피아에 관련된 책들이 많이 나왔습니다. 토마스 무어의 ‘유토피아’ 책도 있었고 캄파넬라의 ‘태양의 도시’라는 것도 유토피아에 대한 이야기가 있습니다. 그 책들에서는 그 유토피아를 이끄는 사람들이 대부분 귀족이거나 왕자거나 지식인입니다. 그런데 여기서는 산초 판사입니다. 산초 판사는 자기 이름도 쓸 줄 모릅니다. 글도 읽을 줄 모르고 쓸 줄도 모르는 사람인데 가서 완벽하게 지금 현재의 민주체제를 예고하는 통치를 합니다. 계급을 없앱니다. 특권을 없앱니다. 그리고 일 하지 않는 자는 그 마을에서 다 추방합니다. 그리고 경제의 질서를 잡습니다. 도매가를 받아서 중간에서 이익을 많이 남기고 소매가를 남기는 이런 것 갖다가 다 통제합니다. 그 모든 면들이 그런데 사실은 공작 부부가 이 사람을 우롱하기 위해서 이 섬을 통치하게 했는데 결국 우롱당한 사람은 이 사람을 가지고 놀았던 사람들이 우롱을 당하는 결과를 맞이하게 됩니다.

이 ‘돈키호테’ 작품을 읽어보면 가톨릭에 있는 여러 계층의 신부들이 나옵니다. 그 사람들이 다 등장합니다. 교회도 많이 나옵니다. 그런데 돈키호테와 산초는 한번도 교회에 갔다는 이야기가 안 나옵니다. 그렇게 성당과 교회가 많으면 종소리가 매번 울려야 됩니다. 지금 스페인의 작은 마을에만 가도 마을 입구에 제일 먼저 있는 게 성당입니다. 마을의 중심점입니다. 그렇게 종교가 강한 나라였다는 것입니다. 중남미에서 오는 금은보화를 돌로 바꿔서 성당을 만든 나라가 스페인입니다.

그런데 종소리가 울렸다든가 이 두 주인공이 교회에 가는 이야기가 한번도 안 나옵니다. 이것은 간접적인 비판입니다. 쓸데없는 맨 미사에 가지만 형식적인 종교, 정말 진정으로 여기 대사가 나옵니다. 신부한테 하는 이야기입니다. ‘약한 자를 보면서 결과에 연연하지 않고 도와주는 것을 너는 망나니라고 하느냐’ 고통에 처해 있는 자를 보는 순간 그 고통을 덜어주려고 생각하는 게 당연히 종교의 의무가 아닙니까? 그 결과에 연연하지 않는 그것이 사랑이 아닙니까?

하여튼 이러한 위대한 내용들을 품고 있는데 이러한 아무리 좋은 작품이라도 읽지 않으면 소용이 없고 읽어서 학습한 바를 현실로 옮기지 않으면 또 소용이 없습니다. 그런데 스페인은 ‘돈키호테’ 읽는 날이 있습니다, 423. 스물 네 시간 대 국민 참여 행사입니다. 누구나 다 나가서 읽습니다. 그리고 대도시든 자그마한 마을이든 그러니까 ‘돈키호테’에 나온 명 문장들을 새긴 타일을 담에다 다 붙여 놓습니다. 그러니까 사람들이 살면서 계속 접하게 되는 것입니다.

스페인에는 몬두라곤과 마리날레다라는 지역이 있습니다. 몬두라곤은 북쪽 바스크 지방이고, 아까 제가 나바라고 했는데 바로 옆이 나바입니다. 여기이고 마리날레다는 안달루시아 남부 지역에 있는 지역입니다. 위에는 완전히 모든 주민들이 협동 조합으로 운영이 되고 밑에는 농업 조합으로 이루어집니다. 그러니까 누구나 다 직업을 갖고 누구나 다 한 건의 투표권이 있고 대표들은 무보수로 봉사를 하고 그 다음에 일주일에 서른 다섯 시간만 노동을 합니다. 그리고 월급은 다 정해져 있고 남는 잉여금은 그 지역의 발전에 다시 재투자되어서 그 마을의 복지에 사용됩니다. 참 모범적인 두 도시가 TV나 인터넷에 들어가 보시면 구경하실 수 있을 것입니다. 여기까지 말씀 드리고 제 강의를 끝내려고 합니다. 감사합니다.

 

 

손자영 연구원 (jyson@ips.or.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