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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목 [2014년 3호]경영자독서모임: 정의의 적들
발간일
2014-10-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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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영자독서모임]

 

정의의 적들

 

(표창원 표창원범죄과학연구소 소장)

 

이 원고는 2014 6 16일 김병종 님의 MBS 강의를 바탕으로 서울과학종합대학원대학원(aSSIST)와 산업정책연구원(IPS)에서 작성하였습니다.

 

소개를 해 주셨지만 저는 약 24년간 청소년기를 마친 이후에 대부분을 경찰 혹은 범죄 영역에서 살아왔습니다. 많은 분들께서 알고 계시겠습니다. 지금은 이제 민간 영역에 나왔기는 하지만 여전히 같은 분야 일을 하고 있습니다. 특히 올 4월에 범죄과학연구소를 설립을 하면서 여러분들 대부분 경영자이실 텐데 후배가 되었습니다. 나름대로 저도 경영이라는 것을 이제 하게 되었는데 너무 어렵습니다. 가서 범인 잡으라고 하면 얼마든 잡겠고 학생들 가르치라고 하면 얼마든 가르치는데 이게 비용 중에서도 특히 고용하고 인건비 다 이렇게 마련해 드려서 책임지고 하루하루 넘어가는 게 결코 쉬운 일은 아니다 라는 것을 절감을 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그 동안 우리 사회에서 크고 작은 많은 기업들이 경제 활동을 해 나가면서 어떻게 우리 사회를 이렇게 발전시켜왔고 그 와중에 얼마나 많은 어려움들이 있으셨는지 조금은 제가 이제 이해할 것 같습니다. 그래서 여러분을 뵙게 되어서 너무나 영광이고 제가 가지고 있는 아주 작고 보잘것없는 지식이지만 함께 나누어 보고 싶습니다.

그리고 혹시 홍보 하나 하자면 여러분 중에 CSI 혹은 프로파일링 이런 부분 관심이 있으시거나 여러분의 자녀께서 관심이 있으신 분들은 곧 8 1일부터 15일까지 CSI, 프로파일링 체험전을 합니다. 실제로 CSI 요원처럼, 프로파일러처럼 범죄 현장에서 이 사건을 해결해 볼 수 있는 그런 기회를 드리니까 혹시 관심 있는 분들은 인터넷 한번 찾아보시고 와 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이 사진은 제가 직접 찍은 사진입니다. 혹시 보신 분 계십니까? 어디에 있는지 아시는 분 계십니까? 이 사진은 미국의 심장부, 수도 워싱턴DC에 있는 연방정부 청사 그 중에서도 법무부의 입구에 음각으로 새겨진 글씨입니다. ‘Justice alone sustains society.’ 우리 말로 하자면 오직 정의만이 사회를 지탱한다입니다. 글쎄 입니다. 각자 그렇지, . 법무부에 그런 글귀 있는 것은 당연하지이렇게 넘어갈 수도 있을 것 같습니다.

그런데 제가 이 글귀를 보는 순간 저는 작은 충격을 조금 받았습니다. 자본주의의 정의라는 게 바로 이것이 아닐까. 우리가 민주사회, 완전하지 않을지는 모르겠지만 인류가 그 동안 만들어내고 노력하고 싸워오면서 지켜왔던 그 가치의 핵심이 이것 아닐까 라는 것입니다. 경제도 중요하고 노동, 교육, 산업, 보건 안 중요한 게 어디 있겠습니까? 국방도 그렇습니다. 그런데 어떤 부분이든지 무너질 수 있고 와해될 수 있고 문제가 생길 수 있겠습니다. 특히 경제 같은 경우 미국도 1930년대 대공황을 거치면서 완전히 경제가 무너졌던 경험도 있었습니다.

그런데 어떤 것이든 무너져도 다시 살아날 수 있다는 것입니다. 우리도 지난 1990년대 말 외환위기를 겪으면서 경제가 거의 와해되고 default 선언, IMF의 지원을 받아서 겨우 회생했던 경험이 있지 않습니까? 하지만 다시 국민들의 힘으로 또 여러 기업들, 경영자 여러분의 노고로 다시 일어섰습니다. 그런데 만약에 한 사회의 정의라는 게 무너진다면, 여기에서 말하는 정의란 경제적 정의, 복지적 정의 다양한 정의들을 다 말하는 것은 아닙니다. 법무부 청사이기도 하고 사법적 정의를 말합니다. 옳고 그름, 법을 어기는 행동, 남을 괴롭히고 남의 것을 빼앗는 가해 행위 이런 것들이 제대로 정확하게 규율 되고 또 발견되고 응당한 법의 심판이 내려 지느냐, 그렇지 않느냐. 열심히 성실하게 노력하고 법과 규율과 도덕을 준수한 사람들이 그 사회에서 인정받고 보상 받느냐? 이 문제를 이야기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러한 기본적인 사법적 정의가 무너진다면 아무리 경제가 활성화되고 다른 모든 것들이 발달하더라 해도 그 사회는 오래 지탱하기 어렵다. Sustain ability가 떨어질 수 밖에 없다 라는 것입니다. 왜 그러냐 하면 바로 그러한 정의의 밑바닥에는 옳고 그름이라는 부분이 있고 그것은 결국 신뢰라는 것으로 연결되기 때문입니다. 사회에 대한 신뢰, 시스템에 대한 신뢰, 정부에 대한 신뢰, 국가 기관에 대한 신뢰입니다. ‘내가 힘이 없어도 나쁜 강자들이 나를 마음대로 때리거나 내 것을 빼앗아 가지 않을 거야라는 신뢰입니다. 그래서 이 사회에서 내가 법을 준수하고 도덕과 윤리를, 사회 규율을 따라 가는 한 나는 안전할거야. 노력의 대가를 받을 거야라는 그 신뢰, 기본적 신뢰를 사회 구성원들끼리 기본적으로 공유하지 않는다면 그 사회는 결국 만인 대 만인의 투쟁 상태, 정글과 같은 약육강식의 짐승들의 세상이 되겠습니다.

그럴 경우에 과연 누가 살아남을 수 있을까? 육체적 힘이 가장 강한 사람은 살아남을 수 있겠습니까? 그가 아무리 육체적으로 강해도 뒤에서 찔러오는 칼날을 피할 수는 없겠습니다. 지능이 가장 뛰어난 사람은 살아남을 수 있습니까? IQ 250 멘사의 소속된 사람들이 살아남습니까? 아무리 지능이 높다 하더라도 여러 사람들의 공격에는 당해낼 재간이 없겠습니다. 그런 것들을 이야기 하고 있다 라고 저는 받아들였습니다. 그래서 정의라는 것이 우리가 우리 모두의 꿈이기도 했습니다. 어린 시절 동심이기도 했습니다. 저도 어린 시절 로보트 태권V, 마징가Z 그리고 캔디캔디 입니다. 조금 다릅니까? ‘정의의 이름으로 너를 용서하지 않겠다라는 그런 멋진 공주 이런 우리들의 동심을 채워줬던 것들이 다 정의 아니겠습니까? 우리들 모두의 꿈이기도 하지만 현실적으로도 사실 그렇다 라는 것입니다.

그 다음에 개인적 차원도 사실 그렇습니다. 우리가 특히 부모의 입장이 되었을 때 자녀에게 무엇을 중요하게 이야기 할까. 최근에 우리 세대들이 많이 안타까워하는 것들이 너무 우리 자녀들을 이익, 이해, 성취, 성과, 경쟁 이런 것으로 몰아가고 있지 않는가 라는 이야기를 많이 공유하고 있습니다. 사회 가치가 하락하고 있지 않는가? 그 이면에는 무엇이 있을까? 부모님들의 심경은 내 아이가 잘 살아야 될 텐데. 내 아이가 행복해야 할 텐데. 내 아이가 뒤쳐지면 안될 텐데라는 불안과 걱정과 두려움이 있습니다.

문제는 그렇게 해서 생존과 경쟁에서의 승리를 가장 중시 여기는 습관이 배어 있는 우리 자녀들이 커 나갔을 때 과연 행복할까 라는 질문을 던지고 싶다는 것입니다. 왜냐. 인간은 그렇게 만들어지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제가 어렸을 때 조금 바보 같은 짓을 하면 늘 듣던 말이 너는 머리를 장식품으로 달고 다니냐이런 말을 많이 들었습니다. 그래서 장식품 치고는 조금 그렇게 예쁘지는 않은데?’ 이런 생각도 하고는 했었습니다. 그 의미를 나중에 공부하면서 깨닫게 된 것입니다. 머리는 장식품이 아니다. 왜냐. 우리 인간의 모든 감정, 정서, 성격, 행동 이런 것들은 바로 머리에 의해서 머리 안에 있는 뇌에 의해서 결정된다는 것을 알게 되었기 때문입니다.

다른 것은 다 제쳐두고 살아가면서 우리가 행복이라고 느끼는 것의 실체가 무엇일까? 행복이 실체가 있을까? ‘행복이 무엇인지 알 수는 없잖아요이런 노래 아십니까? 그런데 그 노래의 끝에는 당신 없는 행복이란 있을 수 없잖아요이렇게 해서 이제 사랑, 동반, 우애 이런 것들을 행복의 요체 라고 우리 대중가요들은 말을 하고 있습니다. 틀린 말은 아닙니다. 하지만 아주 정확하고 그것만이 행복은 또 아니지 않습니까?

그래서 봤더니 인간의 두뇌는 인간의 감정과 정서와 행동과 성격을 결정하고 조절, 통제하는 이 두뇌는 대단히 신비롭게 만들어져 있더라. 어떤 부분에서 입니까? 대뇌의 변연계, 선조체 라고 하는 영역이 있는데 여기는 자극이 되면 우리가 흔히 말하는 행복감이라고 느끼는 쾌감, 쾌락을 느끼게 만들어주는 아주 최첨단의 기능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래서 변연계, 선조체가 자극 받아서 활성화 되면 문학에서 이야기하는 구름에 둥 뜬 것 같은 그런 느낌 또는 뒷목을 타고 흐르는 전기의 전율, 짜릿짜릿함, 눈에서 하트가 나오고 만화에서도 표현을 하지 않습니까? 그런 모든 것들이 사실은 그냥 상상의 산물이 아니라 우리가 가장 기뻤을 때, 가장 쾌감을 느낄 때 신체에서 일어나는 반응을 표현한 것들입니다. 그러한 신체 반응들이 어떻게 나오느냐? 바로 선조체의 역할이다.

여기서 이제 의문이 나옵니다. 그러면 어떨 때, 어떤 조건에 있을 때 우리 대뇌의 선조체가 반응하느냐. 아마 여기 와 계신 선생님들 각자가 나름의 경험, 나름의 취미, 나름의 습관을 가지고 계실 것입니다. 어떤 분은 예를 들어 저 드넓은 초록색 골프장에서 드라이브를 날렸을 때 나이스 샷소리가 나올 때 쭉 뻗는 그럴 때 거기서 나는 최고의 행복을 느낀다. 이런 분들께서도 계실 것입니다. 어떤 분께서는 우리 특히 선배님 연령대 정도 되신 분들은 ‘첫 손주가 태어났을 때 그 만큼은 다른 어떤 것과도 비교할 수 없어’ 이렇게 생각하실 분들도 계시겠습니다. 어떤 분은 우리 회사의, 내 부서의 실적이 최고치로 올라갔을 때 정말 짜릿짜릿했어여러 가지가 있겠습니다. 하지만 그런 개인차 또는 취미의 차이, 경험의 차이 이런 것들을 배제시키고 모든 사람들의 공통적으로 발생하는, 우리의 변연계, 선조체를 자극 시켜서 쾌락 중추, 쾌감 중추가 작동해서 우리가 흔히 행복감이라고 표현하는 신체 변화가 일어나는 그 동일한 유니버셜한 조건이 무엇일까?

이것을 알기 위해서 우리 심리학자들이 실험을 해 봤습니다, UCLA 대학에서. 어떻게 실험을 했느냐? 나이, 직업, 성별 우리가 알 수 있는 모든 특성들을 가급적으로 균등하게 샘플링을 하고 자원자를 받았습니다. 그리고 그 분들께 다양한 음식도 드리고 돈도 드리고 여러 가지 경험을 하면서 뇌에 대한 측정을 해 본 것입니다. 그것만 한 것이 아니고 바로 옆에 우리와 DNA 유전자 구조가 상당히 유사한 그런데 체구는 아주 작은, 생애주기도 짧은 어떤 동물입니까? 미키마우스 같은 쥐를 옆에 놨습니다. 아주 유사한 조건을 쥐들에게 준 것입니다. 인간과 동물과 유사한 것은 어떤 것이고 다른 것은 무엇일까?

맛있는 음식을 먹었을 때 , 행복해그것은 인간이나 동물이나 똑같다는 것입니다. 편안하게 쉴 수 있는 상황을 주었을 때 똑 같은 행복감을 느낀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동물은 전혀 느끼지 못하는 행복감 그리고 가장 강한 행복감, 인간이라는 누구나 성격이나 나이나 성별과 상관없이 똑같이 행복감을 느끼는 조건 그것이 무엇이었느냐. 바로 공정하다, 정의롭다 라는 상황을 본인이 직접 체험하거나 목격하는 상황에서 인간들은 모두 선조체가 반응을 하더라 라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정의는 사실 외부에서 강요하는 윤리와는 조금 다릅니다. ‘네가 싫더라도 이렇게 해야 해그렇습니까? 부모님들이 우리 자녀에게 교육시킬 때 입니다. ‘네가 힘들더라도 그리고 귀찮더라도 너 심부름하고 부모 공경하고 어른 말씀 잘 듣고 인사 잘 하고 이렇게 해야 해라고 가르치지 않습니까? ‘싫어도 해.’ 정의는 그런 게 아니라는 것입니다. 실제로 올바른 일을 본인이 어떠한 유혹이나 어려움에도 불구하고 수행했을 때 짜르르 전율을 느끼는 행복감을 느끼게 인간은 설계되어 있다는 것입니다.

반대로 인간의 대뇌의 다른 부위에 섬엽이라는 부위가 있습니다. 이 섬엽이라는 부위는 선조체와는 정 반대로 자극이 될 경우에 인간의 정서, 감정을 관장하는 전두엽 부위를 자극을 하는데 그 때 아주 기분 나쁜 느낌, 우리가 흔히 이야기하는 정말 짜증나고 불쾌하고 요즘 젊은 친구들 표현으로는 꼭지가 도는 그런 신체적 생리적 변화를 만들어내는 부위가 바로 섬엽이라는 부위입니다.

그러면 섬엽이라는 부위는 어떨 때 자극 되느냐? 역시 개인차가 있습니다. 어떤 분은 자신의 신체적 특징을 누군가가 이야기 할 때 열을 받습니다. 제가 과거에 다뤘던 사건 중의 한 건은 직장동료끼리 회식을 하고 2차 가서 술도 또 마시고 3차 때 살인사건이 발생을 합니다. 치정이 얽혔습니까? 삼각관계입니까? 돈을 거액을 빌렸는데 안 갚았습니까? 아닙니다. 평상시에 대단히 사이가 좋았던 동료 사이입니다. 같이 술을 마시다가 실제 일어난 일이니까 대단히 죄송한 일이지만 저희 부친도 그런 상황이고 여기도 계시지만 우리가 흔히 말하는 대머리라고 하는 탈모 증세가 있는 분입니다. 그런데 그 분이 나이가 30대 초반이셨습니다. 그런데 탈모가 빨리 와서 흔히 말하는 대머리 라는 현상이 있었는데 그 말을 제일 듣기를 싫어했습니다, 너무나 그게 콤플렉스였고. 평상시에는 다들 주위 조심을 하십니다. 그런데 술을 드시고 3차까지 가는 상황이다 보니까 한 분이 무심결에 어이, 대머리이러면서 이야기가 나온 것입니다. 그 순간 섬엽이 팍 작동을 하면서 앞에 있던 소주병을 들어서 상대방을 내려치게 된 것입니다. 사망이 일어났습니다.

인간이 그런 존재라는 것입니다. 개인차가 있습니다. 누구 어떤 사람에게는 자신의 신체든 성장과정이든 때로는 어떤 분은 부모에 대해서 안 좋은 이야기를 하면 도저히 못 견디는 사람이 있습니다. 오늘 새벽에 월드컵 결승전이 끝났습니다. 그렇습니까? 그런데 이번 월드컵 기간 중에 여러 가지 이야기가 있지만 카메룬의 알렉스 송이라는 선수는 그냥 앞에 가는 다른 선수를 팔꿈치로 가격을 했다가 퇴장 당해버립니다. 그래서 팀이 완전히 4:0으로 지게 됩니다. 그 전에 페페라는 포르투갈 선수는 앉아있는 독일 선수의 머리를 들이받았다가 또 퇴장 당합니다. 유사한 일이 2006년 월드컵 때도 결승전에서 일어났습니다. 프랑스와 이탈리아의 팽팽한 1:1 접전 후반 마지막 직전에 지단이라는 프랑스 최고의 사령관이라고 하는 선수가 이탈리아 선수의 가슴을 머리로 들이받습니다, 카메라와 심판 앞에서. 당연히 퇴장 당합니다. 10명으로 줄어든 프랑스는 2:1 역전 패를 하면서 월드컵 우승의 꿈이 날아가버렸습니다.

세계 최고의 선수들이 국가의 명예, 온 관심이 쏠려 있는데 도대체 그런 멍청한 짓은 왜 할까? 이것 때문에 그런 것입니다. 그 순간 왜 그랬습니까? 마테라치라는 이탈리아 선수가 수비를 하면서 지단한테 지단 선수의 어머니와 누이를 모욕하는 말을 합니다, 경기 중에. 그 때 주장이면서 세계 최고의 선수였던 지단은 월드컵 결승이라는 막중한 상황이 아무 생각이 없어지는 것입니다. ‘네가 내 어머니와 누이를 모욕했어? 나는 견딜 수 없어.’

사람들은 다 그런 개인차가 있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런 개인차에도 불구하고 마찬가지로 동물들과는 전혀 달리 인간에게만 작용하는, 유니버셜하게 누구에게나 섬엽을 자극시켜서 분노하게 만드는 조건 역시 불공정과 불의입니다. 옳지 않은 일을 당했을 때 입니다. 그렇습니까? 최근에 우리 자살도 많은 문제가 됩니다. OECD 국가 중에 자살증가율 1, 영광의 1위를 차지했습니다.

왜 그럴까를 분석을 해 봅니다. 어떤 분들은 그냥 한국 사람들이 원래 그렇지, . DNA, 민족성에저희들은 그것을 인정하지 않습니다. 민족성 이런 것은 없다고 저희들은 봅니다. 문화적인 영향, 사회적인 영향은 있겠지만 유전적으로 자살을 많이 하는 민족 이런 것은 없다고 의학적으로나 범죄심리학 쪽으로나 확인을 하고 있습니다. 무엇입니까? 한쪽으로는 이 섬엽을 자극하는, 분노하게 하는 불의와 불공정한 상황들이 다른 나라에 비해 많이 만들어지고 있는 것이 아닌가 하는 것입니다. 다른 하나는 어렸을 때부터 성장 과정에서 그러한 불의나 불공정에 대응하는 방법을 제대로 배우지 못하고 있기 때문이다 라는 것입니다. 어쩔 줄 몰라 하는 것입니다.

어제도 우리 도로에서 두 차가 실랑이가 벌어집니다. 기사에 보도 된 내용입니다. 끼어들려고 하는 데 안 끼워줬습니다, 한 차가. 그랬더니 끼어들려고 하다가 못 끼어든 차가 그 다음 건널목 앞에서 결국은 앞으로 끼어들더니 차를 세우고 내립니다. 그런데 그 손에는 칼이 들려 있었습니다. 다행히도 그 뒤차의 운전자가 창문을 올리고 문을 잠가버립니다, 안에서. 그래서 큰 사고는 일어나지 않았고 휴대전화로 112 신고를 하고 떠났고 칼을 들고 갔던 그 운전자는 출동한 경찰에 체포가 되었습니다.

글쎄 입니다. 한 두 개의 개별적 사건이라고 볼 수도 있겠지만 우리가 사는 세상에서 일어나는 일들이 그렇고 우리가 현재 무엇을 향해서, 무엇을 중시 여기면서 어떻게 살아가고 있는가? 우리 자녀들에게 무엇을 가장 중요하게 이야기할 것인가의 문제를 한번 더 생각해보자 하는 그런 차원에서 말씀 드리고 싶다는 것입니다. 정의라는 것은 그런 것이기 때문에 대단히 추상적이거나 책 속에만 있는 것이라거나 또는 영화 속에나 나오는 비현실적인 이런 이야기가 아니라는 것입니다. 바로 너무나 현실적인 것이고 우리의 행복을 좌우하고 있으며 때로는 생명까지도 영향을 미치는 중요한 요소라는 것입니다.

그러면 과연 정의라는 것은 무엇일까? 미국 하버드 대학의 마이클 샌델 교수는 정의란 무엇인가라는 강의와 책 만으로 전 세계 수천만 독자와 시청자를 확보했습니다. 세계적인 유명인이 되었습니다. ‘정의란 무엇인가혹시 읽어보셨습니까? 우리나라에서 정의란 무엇인가가 전 세계 어떤 나라보다 인구대비 판매량이 많습니다. 세계에서 가장 많이 팔렸다는 이야기입니다. 원래 김영사 라는 출판사가 정의란 무엇인가를 번역하기로 결정했을 때 그 출판사에서 상정했던 예상 판매부수는 10,000부를 넘지 않았습니다. 10,000부만 도달하면 이것은 손익분기점을 훨씬 넘어서 소위 말해서 대박이다. 이런 상황이었습니다. 그런데 얼마가 팔렸습니까? 1,000,000부가 넘게 팔렸습니다. 제가 너무 깜짝 놀랐습니다. 제가 대학에서 그 때 정의를 가르치고 있었을 때니까 이야, 대한민국 독서 수준 상당하구나.’ 미국이나 유럽에서의 거의 철학에 대해서 공부하거나 강의하는 사람들이 주로 사는 책이지 일반 대중서가 아닙니다. 대한민국에서는 이게 대중서가 되어있다. 이것은 대한민국의 수준이 철학적, 정의, 윤리적 수준이 대단하다는 그런 지표라고 볼 수가 있겠습니다.

그래서 제가 확인을 해 봐야 되겠다 했습니다. 그래서 전국민 대상 조사는 못하겠지만 가능한 모든 분들께 여쭈어 봤습니다. ‘혹시 정의란 무엇인가라는 책 아십니까?’ 모르는 분들이 없으십니다. 다 아십니다. ‘사셨습니까?’ 라고 했더니 제가 여쭈어 본 분들 중에 약 60%가 사셨다고 합니다. 그 다음에 어떤 질문이겠습니까? ‘읽어보셨습니까?’ 그랬더니 10% 미만입니다, 읽었다 라고 하는 분. 대부분의 답은 어떠하느냐 하면 사 뒀는데 이제 곧 읽으려고입니다. 그것은 무엇을 말하는 것입니까? 그만큼 우리에게는 정의에 대한 갈구가 있다는 것입니다. 뭔가 정의라는 것에 대해서 만족하지 못하고 계시고 세상이 정의롭지 않다 라는 느낌을 갖고 있고 도대체 정의가 뭘까 라는 의문을 가지고 있고 이 문제에 대한 답을 찾고 싶다는 그런 강한 갈구와 욕구와 호기심을 가지고 있다는 그런 증명인 것입니다.

그래서 실제로 그 저자인 마이클 샌델 교수가 한국에 왔습니다. 그래서 미국과 한국 국민들 대상으로 해서 비교 조사를 실시해 봤습니다. 가장 핵심적인 조사 내용이 뭐냐 하면 과연 내가 살고 있는 이 사회가 공정한가. 정의로운가에 대한 인식이 어떤가를 비교해 보고자 한 것이었습니다. 대한민국 국민들의 우리 사회가 공정한가, 정의로운가에 대한 만족도는 얼마나 됩니까? 정의롭다 라고 생각하시는 분들이 얼마나 됩니까? 공정하다 라고 생각하시는 분들이 얼마나 됩니까? 대한민국에서는 73.8%의 국민들이 정의롭지 않다 라고 답을 하고 있었습니다. 미국에서는 64%의 국민들이 정의롭다 라고 답을 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 때의 정의롭다 라고 하는 것은 완전한 정의를 이야기하는 것은 아닙니다. 완전한 공정을 이야기하는 것은 아닙니다. 내가 수긍할 정도는 된다 라는 말입니다. ‘인간의 한계, 사회의 한계 상 이 정도는 공정한 세상이라고 난 생각해라는 답이 64%가 미국에서 나왔다는 이야기입니다.

글쎄 입니다. 그 조사 하나가 모든 것을 결정하지는 않겠지만 우리가 왜 이렇게 세계 10위 권의 경제대국이면서도, 월드컵 4강에도 올라간 축구 강국이면서도, 그렇습니까? 한류 뭐 빠지는 게 있습니까? 세계 피겨의 역사를 새로 쓴 김연아도 우리나라 사람입니다. 도대체 우리가 뭐가 부족합니까? 그런데 우리는 대다수의 국민들이 행복하지 않다. 이 사회는 썩었다. 공정하지 않다라는 느낌을 가지고 살고 있다 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무엇에 우리가 초점을 맞춰야 할까에 대한 것을 한번 생각을 해 볼 필요가 있습니다.

그러면 여기에서 한번 드리는 질문이 그러면 도대체 정의가 뭐야. 무엇이길래 그렇게 정의에 대한 갈구를 우리가 갖고 있는 것이지?’ 입니다. 가장 많은 질문, 많은 혼란이 바로 상대성에 대한 이야기입니다. ‘정의라는 것은 상대적인 것 아냐? 나도 정의롭다 라고 정의하는 내용이 있고 당신도 정의롭다 라고 정의하는 내용이 있지. 5.16의 정의는 뭐야? 보는 사람마다 다른 것 아냐? 5.18의 정의는 뭐야? 보는 사람 마다, 느끼는 사람 마다, 사는 곳에 따라 다른 것 아냐? 보수냐 진보냐에 따라 달라지는 것 아냐?’

그렇게 되면 어떻게 됩니까? 종군위안부 문제는 어떻고 독도는 어떻습니까? 질문의 층위를 올려가거나 또는 횡적으로 벌려 나갈 때마다 혼란의 정도는 커집니다. 내가 어디에 소속해 있느냐에 따라서 답이 달라지는 현상을 본인이 발견하게 되는 것입니다. ‘내가 호남 사람인데 5.18은 무조건 민주항쟁이고 이것은 독재의 폭압이고이것은 당연한 건데 그런데 본인이 가장으로서 자녀가 느끼는 아버지, 우리 집 조금 민주적으로 운영합시다라고 했을 때 무슨 소리야. 말도 안 되는 소리 하고 있어. 권력은 정당한 거야본인이 어디에 있느냐에 따라 달라지더라 라는 이야기입니다.

그 때 우리 사람이 가지고 있는 한계를 마사지 해 주는 답이 뭡니까? ‘나를 안심시켜주고 나는 그래도 괜찮은 사람이야. 나는 그렇게 나쁘거나 불의한 사람이 아니야라는 위안을 주는 말이 바로 상대적 정의 개념인 것입니다. ‘정의는 상대적인 거야. 그러니까 일단 나는 문제 없어. 다른 누군가에게 어떤 문제가 있는지 보자그 문제에 대한 질문입니다.

그렇다 라면 독일의 히틀러는 어떤 의미일까 라는 것입니다. 그것도 상대적이라고 우리가 이야기 해 줄 수 있습니까? 히틀러가 독재자라는 말을 많이 합니다. 그런데 그가 처음부터 힘을 가진 사람이었고 자기의 힘을 이용해서 다수를 억눌렀습니까? 히틀러는 군대에서는 힘 없는 일개 부사관이었을 뿐입니다. 자기 주장을 하다가 탄압 당하고 오히려 소수자로서 박해를 당했던 사람입니다. 그런데 그의 강성대국, 아리안족, 백인 민족의 우수성, 게르만족의 우수성 이런 부분들에 대한 주장을 많은 독일 사람들이 공감해 주었습니다.

사실은 우리가 민주주의를 다수결이라고 이야기한다면 히틀러는 민주적 절차에 의해서 총통이 되었고 독일 국민 다수의 지지에 의해서 2차 대전을 일으켰습니다. 다수를 차지하는 백인 아리안족의 지지를 받아서 소수민족, 유색인종, 동성애자, 정신병자, 전과자들을 수용소에 집어 넣고 가스실에서 말살시켰습니다. 왜냐. 그들은 사회악이니까 순수한 아리안족의 혈통을 오염시키니까, 열등인자니까 입니다. 우생학, 우수한 인재들만 남기고 열등한 인자들은 번식하지 못하도록 해야 되니까 입니다. 어떻습니까? 상대적 정의의 개념에 따르자면 일리 있지 않습니까? 그런데 왜 지금 독일에서는 헌법으로 나치즘을 금지시키고 있습니까? 나치즘에 대한 찬동이나 지지나 찬성을 불법화 하고 있습니까? 정의는 상대적인 게, 무조건 상대적인 것은 아니다 라는 그런 강한 역사적인 외침이라고 봐야 되겠습니다.

조금 우리한테 가깝게 가져와 보면 정의가 상대적인 것이야라고 이야기 해 버리면 어떤 현상이 나타납니까? ‘지존파는 자기들이 잘못했다고 받아들였습니까? 천만의 말씀입니다. 자기들이 정의였다고 이야기 합니다. ‘가진 자들이 횡포를 부리고 부자들이 가난한 자를 탄압하기 때문에 우리처럼 기회조차 부여 받지 못한 사람들은 늘 핍박 받고 살아. 그러므로 나는 내 나름의 정의를 실현하겠어이게 지존파였습니다. 부자는 악이었습니다, 이들에게. 돈이 많은 것 자체가 악의 상징이고 악의 표현이며 악의 설명이다 라고 그들은 규정했습니다. 그래서 부자들은 무조건 잡아서 살해하는 것을 삶의 목표로 삼았던 이들입니다. 경찰에 검거되었을 때 이들이 가지고 있었던 것은 이 강 건너에 있는 압구정동 현대백화점 VIP 고객 리스트였습니다. 여러분들 중에도 아마 계실지도 모릅니다. 그리고 그들이 청계천 등지들을 돌아다니면서 무기류를 다 구입을 합니다. 그들이 원했던 것은, 목표로 했던 것은 그 고객 리스트에 있던 사람들은 자기들이 마지막 검거되거나 제지되기 전까지 최대한 많은 사람을 죽이겠다는 것이 자기들의 목표였습니다. 거의 테러리스트 게릴라전이 벌어질 뻔 했습니다. 그런데 다행스럽게도 그러한 엄청난 범죄 이전에 몇 건의 연쇄살인 상태에서 경찰이 이들을 검거하게 됩니다.

검거된 상태를 전 세계의 언론이 와서 생방송으로 중계되고 있는 상태에서 지존파가 한 이야기는 무엇입니까? ‘더 못 죽인 게 한이다그래서 기자가 하도 어이 없어서 묻습니다. ‘당신 어머니에 대해서는 어떻게 생각합니까?’ 그랬더니 김현영이라는 이 친구가 어머니? 내 어머니를 못 죽여서 한이오이렇게 이야기를 합니다. 우리가 흔히 이야기하는 인간이기를 포기한 것 아니냐 라는 이야기가 나오는 것입니다. 그는 그만큼 자기는 그것이 정의라고 생각을 했습니다. 그게 옳은 것이라고 생각을 했습니다. 자기는 어렸을 때부터 가난했고, 가난해서 기회를 가지지 못했고, 가난해서 선생님에게 차별을 받았고, 가난해서 좋은 학교에 가지도 못했고, 가난해서 범죄자가 되었고, 가난해서 전과자로서 사회에서 냉대받았고 그래서 이 사회는 나의 적이야 라고 간주 합니다. 상대적 정의의 개념이라면 어떻습니까? 그들도 나름의 정의 주장했으니까 그들도 정의로운 것입니까? 유영철도 유사했습니다.

그래서 상대적 정의의 개념은 대단히 편리하기는 하지만 위험합니다. ‘너희들은 뭐라고 하든 나는 내 정의를 주장할거야이것은 사실 우리가 빠지기 쉽지만 가급적 빠지지 말아야 할 도그마입니다. 최근 우리 사회에서 일어나고 있는 일베 현상이라든지 극단적인 좌, 극단적인 우 이쪽에서 우리 일반 국민들의 상식에 어긋난 주장들 그리고 그들은 자신이 정의라고 주장하고 있습니다.

그러면 과연 이러한 상대적 정의를 탈피하려면 우리에게 무엇이 필요할까? 각각의 학문 분야별로 다양한 다른 이야기들이 나오지만 그 동안 제가 나름대로 연구하고 분석하고 종합한 결론에 따르자면 두 가지 기준이 필요하다 라는 것입니다. 하나는 종적인 기준입니다. 우리가 서 있는 이 21세기 2014년 현재의 우리가 도달한 인식의 수준, 그것은 우리가 시대정신이라고 부릅니다. 지금 우리가 살고 있는 21세기에 20세기적인 정의를 가지고 와서 주장을 하면 어떻게 되겠냐는 것입니다. 우리가 이미 극복한 19세기, 18세기, 17세기의 것을 말입니다. 말이 안 된다는 것 아니겠습니까?

저희들이 범죄 수사를 하는 데 있어서 때때로 조선시대의 CSI 이런 것들을 이제 설명도 해 드리고 그렇게 이야기를 합니다. 우리 조상들이 쓴 무언록이라는 책도 나왔었습니다. 그러면서 때로는 , 우리 조상들이 대단히 현명했다. 범죄사건의 진실을 가리려고 했고 과학적으로 접근을 했다그런데 실제로 그 당시의 기술과 기법을 오늘날 사용한다면 어떻게 됩니까? 거의 80~90%가 누명을 쓰게 될 것입니다. ‘범죄자는 밀가루가 담긴 상자에 손을 넣으라고 했을 때 주먹을 쥐고 빼내지 못한 사람이야이런 게 조선시대적인 프로파일링입니다. 서구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누가 잔인한 범죄를 저지른 자들이야?’ 그러면 몸에 보이지 않는 곳에 악마의 흔적인 흉터를 가지고 있는 사람이야과학적입니까? 그것은 그 시대의 정의였다는 것입니다. 지금 21세기에는 그렇지 않은 것 아니겠습니까?

그래서 그 시대 정신에 부합하느냐는 것입니다. 예를 들어 여러 가지 지금 논란이 일어나고 있지만 우리 시대에 가장 아픈 부분이 독재냐, 민주냐 이런 것 아니겠습니까? ‘독재는 필요했어, 과거에 우리가 너무 못 살았기 때문에. 남미처럼 필리핀처럼 전부 자기가 하고 싶은 대로 다 했다면, 자유와 민주를 무한히 다 보장했다면 우리가 여기까지 왔을까상당히 타당하지 않습니까? 역사에 가정은 없기 때문에 다른 가정이었을 경우 우리가 어떻게 되었을지 모르는 것입니다. 하지만 그것을 21세기 오늘날에도 여전히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지도자에게 모두 맹종해야 해. 모두가 한 가지의 틀 안에서 단결해야 해이것을 정의라고 할 수 있겠느냐는 말입니다. 어렵지만 힘들지만 시간의 흐름에 따라서 종적으로 변화하는 정의의 개념을 우리는 계속 따라가야 합니다. 계속 깨우쳐야 하고 계속 고민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상대성에 빠지지 않기 위해서는 지금 우리가 도달한 이 인식의 수준, 합의의 수준, 시대정신 이 부분을 무시해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또 하나는 횡적인 것입니다. 국제적인 기준입니다. ‘우리만 이것을 정의라고 주장하면 남들, 너희들은 뭐라고 할 자격이 없어. 내정간섭 하지마예를 들어 일본의 집단적 자위권 이라든지 군국주의의 부활이라든지 자기들 내부의 문제니까 우리는 간섭하지 않아야 됩니까? 국제적으로 그러한 제국주의적, 군국주의적인 움직임을 용납하지 않고 정의롭지 않다 라고 하고 있지 않습니까? 명예살인 같은 경우, 지금 이슬람 국가들에서 행해지는 여성이 결혼 전에 다른 남성을 만난다. 그러면 그 여성이 소속된 속한 집안의 가장이나 오빠는 누이나 딸을 살해해도 됩니다. 살해합니다, 지금. 괜찮습니까? 그 나라에서 하는 관습이니까 그냥 놔둬도 됩니까? 국제적 기준이라는 것 역시 대단히 힘들고 어렵지만 우리가 정의가 무엇인가에 대한 고민을 할 때 당연히 따져봐야 되는 것입니다.

그러한 종적·횡적인 기준을 가지고 근거를, 그 정의가 무엇인지를 뒷받침 할 수 있는 근거를 우리가 가지고 있을 때 비로소 우리는 정의롭다 라는 이야기를 할 수 있겠습니다. 그 근거에는 법이 있고 철학이 있고 종교가 있고 윤리가 있고 도덕이 있는 것 아니겠습니까. 많은 젊은이들이 묻습니다. ‘선생님, 세상에 정의가 있습니까? 제가 볼 때는 정의가 없는 것 같습니다. 우리들 현혹하지 마십시오. 어차피 세상은 그렇고 그런 것 아니겠습니까? 끼리끼리, 힘의 논리로 힘 있고 돈 있고 빽 있는 사람은 법을 어겨도 나쁜 짓 해도 전혀 불이익 받지 않고 힘 없고 돈 없고 빽 없는 사람은 잘못하지 않아도 잘못했다고 인정해야 되는 것이 세상 아니겠습니까?’ 이런 이야기를 많이 합니다. 과연 그렇습니까? 우리 세상이 과연 그렇습니까? 그러한 질문들이 바로 73.8%의 국민들이 대한민국은 공정하지 않다 라는 그런 표현으로 나타난 것이겠습니다.

더 가슴 아픈 조사 결과는 뭐냐 하면 흥사단 투명사회운동본부에서 조사한 결과인데 우리 고등학생들을 대상으로 조사한 연구에서 응답자의 65%적발당하지 않는다면 법을 어겨도 좋다라고 응답을 하더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10억 원 정도의 돈을 벌 수 있다면 1년 정도 감옥에 갔다 올 용의가 있다여기에 라고 70% 정도 가까운 고등학생들이 응답을 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지금. 왜 그럴까 라는 것입니다. 정의에 대한 포기 현상이 특히 우리 어리고 젊은 친구들에게서 지금 일어나고 있는 것입니다.

저는 그렇게 생각을 합니다. 그 이유는 제가 이 책에서 주장하는 정의의 적들은 바로 그러한 우리들의 정의에 대한 포기를 먹고 살아간다. 우리들이 정의는 존재 해. 그리고 실현 돼. 우리는 포기하지 말아야 해라는 공감대가 형성되면 형성될수록 정의의 적들은 설 자리를 잃게 됩니다. 공정경쟁을 해야 합니다. 법과 윤리, 도덕을 준수해야 됩니다. 그런데 그것은 귀찮고 불편하고 자기들에게 이롭지 않다 라고 느끼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그들은 끊임없이 전파를 합니다. 정의를 위협하고 정의에 도전하고 정의라는 것은 상대적인 것처럼 뭐가 정의야, 도대체?’ 라는 오해와 혼란으로 빠져들게 만드는 노력들을 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또 하나가 이제 학습의 문제인 것입니다. 개인적으로 여러분들 많이 공감을 하실 것입니다. 여러분들 다 잘 아시는 신창원이라는 사람이 있습니다. 저와 이름은 같은데 인생이 완전히 달라진 사람입니다. 신창원이라는 친구가 쓴 비망록에 그런 글이 있습니다. 초등학교 5학년 때 선생님이 학교에 납부해야 할 납부금을 안 가지고 왔다고 해서 이 쓸데없는 자식아. 돈도 안 가지고 오면서 학교는 뭐 하러 와라고 했다고 하는 것입니다. ‘그 말을 듣는 순간 자기의 마음 속에서는 악마가 자랐다이렇게 쓰고 있습니다. 제가 만나본 수 없이 많은 범죄자들이 유사한 경험을 이야기를 합니다. 그래서 우리 사회가 어렸을 때부터 정의가 이기지 않는 경험들을 하게 한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것은 옳지 않지 않습니까?’ 라는 항거를 했을 때 힘의 눌림을 경험한다는 것입니다. 좌절을 경험한다는 것입니다. 직간접적인 그런 경험들이 학습으로 이어지고 사회, 세상은 원래 그런 것이야라고 느끼게끔 만들고 있는 것입니다. 그런 부분들이 과연 우리가 어떻게 이겨낼까 하는 숙제라고 저는 생각을 합니다.

오늘도 제가 지금 벌어지고 있는 여러분들 다 잘 아시는 김형식 서울시의원의 청부살인 사건에 관련한 회의, 논의 그리고 인터뷰 이런 것들을 하고 왔습니다. 참 안타깝습니다. 너무나 아픕니다. 그런데 그 이면에 이런 부분들이 모두 다 들어가 있음을 발견을 합니다. 세상이 어떤 곳인지 무엇을 향해 살아야 하는지 무엇이 소중한지 이런 것들에 있어서 결국 학생운동권 출신이고 민주주의의 어떤 상징이고 정의를 부르짖었던 야당 정치인이 선택하고 결국 추구하는 것들은 옳음, 정의보다는 성취, 경쟁, 이익이었다는 것입니다. 그것이 결국 커다란 그런 비극으로 이어졌다는 것입니다. 물론 무죄추정의 원칙이 적용되기도 하고 아직까지 재판은 벌어지지 않았고 본인이 음모에 빠졌다. 청부살인을 지시하지 않았다라고 주장을 하고 있습니다. 그 부분은 분명히 존중해야 합니다. 보여주는 그 모습들에서 추정이 된다는 이야기입니다.

그 이외 다른 많은 사건들에서 너무나 똑 같은 패턴을 읽습니다. 너무나 아쉽고 안타까운 패턴들인 것입니다. 그래서 결국 우리가 한번 고민해봐야 할 것 그것은 정의라는 것이 결코 각자가 자기 입장에서 자기에게 유리한 대로 주장하는 옳음이 아니라 힘들고 어렵더라도 보편적인 옳음을 추구해야 된다는 것, 이중 잣대가 아닙니다. 무지의 장막 뒤에서 내리는 선택과 결정을 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무지의 장막이라는 개념입니다. 존 롤스라는 철학자가 내 놓은 개념입니다. 무엇이 옳으냐? 무엇이 정의냐 라는 것을 이야기 할 때 이 결정, 선택에 따라서 나에게 혹은 나와 관련된 사람들에게 어떤 영향이 미치느냐를 알고 있게 되면 사람, 인간은 절대로 올바른 결정을 하지 못하게 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무지의 장막 뒤로 가야 된다는 것입니다. 이 선택, 결정이 나나 나와 관련된 사람들에게 어떤 영향을 미치는 지를 몰라야 우리는 제대로 된 결정을 내릴 수 있다는 것입니다.

정보화 사회에서 이미 다 공지되어 있는데 우리가 어떻게 모를 수 있습니까? 그 때 우리는 최대한의 노력을 기울여서 스스로가 무지의 장막을 만들어 내야 한다는 것입니다. 예를 들어 내가 개발에 관한 정책 결정 권한이 있다. 어디를 개발하느냐? 그 결정을 내림에 있어서 강남을 개발할까, 강북을 개발할까, 서초를 개발할까, 송파를 개발할까. 어디를 개발하는 것이 우리 문중 땅이 속한 곳이지? 우리 처가나 사돈의 팔촌이 어디에 땅을 가지고 있지? 또는 경제 정책이 어떤 테마주의 상승을 불러일으키고 어떤 테마주의 하락을 불러일으킨다고 생각했을 때 어떠한 정책을 어떻게 내릴까에 대해서 자기와의 연관성을 생각하게 되는 순간 우리는 이미 무지의 장막 뒤에 있지 않게 되는 것입니다. 김형식 의원 사건도 결국 그것이었습니다. 돈이 오가는데 그 핵심은 무엇이냐? 토지의 용도를 변경하느냐 마느냐의 서울시와 해당되는 강서구의 어떤 결정의 무지의 장막이 아닌 연관성이 개입되도록 하고자 했던 여러 가지 것들이 개입됩니다.

이 문제를 과연 우리가 어떻게 해결해야 됩니까? 가장 간단하게 생각할 수 있는 방법이 있습니다. 콜라가 한 병이 있습니다. 한 병 밖에 없는데 두 명의 아이가 너무 콜라를 먹고 싶어 합니다. 잔을 두 개를 줍니다. 공정하게 나눠야 합니다. 제 아이 둘이 그렇습니다. 정말 한 방울이라도 누나에게 더 간다면 동생은 받아들이지를 못합니다, 절대로. 누나 역시 똑같습니다. 다섯 살 차이인데 절대로 동생에게 요만큼이라도 더 가면 용납을 못 합니다.

어떤 방법이 있습니까? 콜라 한 병을 두 잔으로 나누는 정의, 그것은 어떻게 구현 가능합니까? 한 가지 방법은 당사자 둘이 아닌 이해관계 없는 제 3자에게 부탁하는 것이겠습니다. 그런데 아빠는 신뢰받지 못합니다. 누나는 아빠가 동생을 더 좋아한다고, 편애한다고 이미 오해를 하고 있습니다. 분명 오해입니다. 식당 아주머니는 전문성이 있습니까? 그냥 막 따르다 보면 어디가 더 많습니다. 3자에게 부탁하는 것도 고민입니다.

콜라 한 잔의 정의는 무엇일까? 한 사람은 따르고 다른 한 사람은 선택하게 하는 것입니다. 제가 직접 한 번 해 봤습니다, 우리 두 아이한테. 그렇게 콜라에 목숨 거는 두 아이는 자기가 따를 수 있는 권리를 처음 받았을 때 너무나 , 내가 따른다그러더니 그 다음 순간 무엇입니까? 내가 따른 결과를 동생이 선택을 합니다. 떨립니다, 손이. 한 컵에 조금이라도 더 들어갈까 봐 입니다. 왜냐. 그러면 매의 눈으로 쳐다보고 있는 동생이 바로 채 갈 것입니다. 저는 그 때 정말 인간의 정밀함이 어떤 수준까지 올라갈 수 있는지 목격했습니다. 진짜 땀방울이 떨어질 정도로 온 신경을 곤두세워서 똑같이 따르기 위해서 노력을 합니다.

아주 단순화 시키면 그렇다 라는 것입니다. 우리가 권력의 분립이며 또는 이해충돌의 방지며 이런 것들을 하는 이유가 거기에 있고 참 콜라 한 잔을 둘로 나눈 것은 어떻게 보면 간단할지 모르지만 똑 같은 원리를 우리 사회 상황에 또는 기업 내부의 상황에, 기업 상황도 똑같지 않습니까? 부서 간 또는 승진을 누가 할 것이냐 등 여러 가지 것들에 있어서 어떤 것이 정의로우냐. 어떤 부서, 어떤 업무에 조금 더 많은 가점을 줄 것이냐? 인사고과 평정을 어떻게 할 것이냐? 그런 모든 것들이 사실 다 정의의 문제 아니겠습니까? 거기에 있어서 사실 원리원칙은 간단하고 단순하지만 그 정의에 대한 신뢰를 얻어내기는 쉽지가 않다. 불만이 따르기 마련이다.

그래서 다양한 정의의 문제가 있기는 하지만 앞서 제가 말씀 드린 것처럼 그래서 가장 핵심이 되고 가장 중심이 되는 것은 사법적 정의 아니겠느냐? 분배의 정의 당연히 최선을 다 해 하겠습니다. 그리고 복지적 정의 다 그렇습니다. 하지만 모든 것들이 다 완벽할 수도 없고 그 당시에는 무엇이 옳고 그른지 판단하기 대단히 어렵습니다. ‘서초구를 개발하겠어라는 결정이 옳은지 안 옳은지 그 결정권자의 연결고리가 이익이 어디에 있는지 우리는 알지 모르기 때문에 그 당시, 그 순간에는 모릅니다, 최대한 노력은 해봐야 되겠지만. 그렇습니까? 결과적으로 문제가 있다면 그 문제는 소리가 나게 되어 있고 그 소리가 심각하고 클 경우에는 사법적인 문제로 이어지게 됩니다. 그래서 사법부를 최후의 보루라고 하는 것입니다.

사법적 판단이 공정하기만 한다면 사람들이 다 자기 이익을 위해서 예를 들어 우리가 축구 경기도 똑같지 않습니까? 우리 선수들이 다 순진합니까? 안 그렇습니다. 시뮬레이션, 헐리우드 액션 또 안 보는 것에서 핵 이빨로 물어 뜯기도 하고 발로 차기도 하고 그게 사람의 본성입니다, 천사가 아니니까. 그런데 큰 문제가 없는 것은 그냥 넘어가기도 하고 만약에 분쟁과 문제가 생기면 결국은 심판과 피파와 이런 사법적인 절차에 의해서 입니다. 그런데 만약 그 절차가 잘못되어 있다면 우리 김연아 선수가 최고의 경연을 벌였지만 판정하는 사법적인 세계 피겨 연맹과 소치 동계 올림픽의 사법적 구조가 rotten, 오염되어 있다면 좌절과 실망과 불의의 전파가 일어난 것 아니겠습니까? 그래서 사법적 정의는 무엇과도 바꿀 수 없고 결코 양보할 수 없는 가장 중요한 그 사회의 보루이며 지탱요소다 라고 생각을 합니다.

그래서 저는 이 책을 쓰면서 이러한 사법적 정의를 해치는, 해치려고 하는 그럼으로써 이 사회에 정의에 대한 불신을 그 씨를 뿌리고 혼란을 조장하고 정의의 상대적 개념을 자꾸 불러일으켜 세워서 결국은 자신들의 불의하고 불법한 행동과 활동들에 대해서 방해 받지 않으려는 그 정의의 적들을 우리는 간과해서는 안되며 확인하고 막아야 한다고 제가 책에서 주장을 하고 있습니다.

세 가지 유형의 정의의 적들이 있다. 첫 번째 정의의 적들은 그들 스스로가 직접적으로 정의를 훼손하고 법을 어기고 불법적인 이득을 취하려는 범죄자들입니다. 범죄자들은 유영철, 정남규처럼 사이코패스만 있는 것은 아니고 아직까지 확정 판결은 안 났지만 김형식 의원이나, 또는 자기의 아이를 임신한 만삭의 부인을 살해했던 의사 그도 결국은 끝까지 대법원 갈 때까지 자신의 죄를 인정하지 않았었습니다. 부산의 정보통신관련 국내 최고의 전문가 중 한 분이었던 교수 역시 자신의 아내를 살해하고 완전 범죄를 꿈꿨었습니다. 정의의 적들인 범죄자는 생계형 범죄자로부터 그런 지능형 고급 엘리트 범죄자들도 있습니다. 그들이 시도한 것은 뭐냐 하면 계속해서 의심을 불러 일으키는 것입니다. ‘경찰이 공정한 줄 아세요? 아니에요. 나는 누명 받고 있어요. 저들은 공정하지 않아요. 나를 정치적 희생양으로 만들고 있고 나를 모함하고 있고 나 같은 사회적인 지위가 있는 사람을 범죄자로 내세워서 자신들의 공을 인정 받으려 하고 있어요이런 의심을 자꾸 불러일으키려 합니다. 절차의 문제를 제기를 합니다.

두 번째, 그러한 문제를 악화시키는 가장 큰 문제가 뭡니까? 수사기관 내에서 실제로 그러한 잘못된 행위들이, 범죄자가 아닌 사람을 범죄자로 만드는 혹은 범죄자인데도 눈 감아주고 봐주는 일들이 벌어지고 있다는 개별적인 사건들이 발생할 때마다 많은 사람들의 마음 속에는 의심의 씨앗이 뿌려지는 것입니다. ‘경찰? 검찰? 이야. 저것들 썩었네.’ 그러니까 피의자들, 피고인들이 억울하다고 할 때 진짜 억울한가 보다이렇게 생각이 들게 되는 것 아니겠습니까? 그들도 인간이기는 하지만 보통 인간과는 다르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수사기관에 종사하는 혹은 사법부에 종사하는 사람들은 정말 자신들은 이 법과 윤리, 도덕, 정의의 문제에 있어서 만큼은 무지의 장막 뒤에서 최선의 노력을 다하겠다 라는 노력이 없다면 아예 그 직업으로 가면 안 됩니다. 가서는 안 됩니다. 그런데 너무나 안타깝게도 경찰관들도 범죄를 저지르다가 적발되고 검사들도 뇌물을 받다가 적발되고 판사들도 성 매매 하고 향응 받다가 적발되고 이런 일들이 벌어지고 있지 않습니까. 때로는 제 식구 감싸기입니다. 자기들 내면에서 일어난 잘못된 행위들은 처벌하지 않고 감싸고 눈 감아주고 힘 없는 서민들의 범죄는 무거운 망치로 때립니다. 그래서 저는 그들을 정의의 적이라고 부릅니다. 그들이 아무리 소수일지언정 그들이 존재한다는 이유만으로도 이미 우리 사회는 정의의 상대성에 대한 정의의 불신에 대한 씨앗들은 뿌려지고 있기 때문에 이들은 정의의 적일 수 밖에 없습니다.

세 번째 정의의 적은 권력형 범죄자들입니다. 가장 악하고 가장 위험하고 가장 해악이 큰 정의의 적이라고 저는 생각을 합니다. 왜냐. 이들은 가장 영향력이 크고 가장 힘이 세기 때문에 자신들의 힘을, 권력을 이용을 해서 불법, 부당, 불공정한 행동 등을 하고 그로부터 자신이나 다른 사람들에게 이익이 발생하도록 하고 혹은 타인에게 불이익이 발생하도록 하는 그것을 자신에게 부여된 권한이나 재량으로 생각하는 그런 권력형 범죄자들이 존재했다는 우리 과거 역사의 사실 때문에 지금도 73.8%의 국민들이 대한민국은 공정하지 않아. 여전히 어디에선가 비리가 행해지고 있을 거야. 권력자들이 법을 무시하고 농락하고 우롱하고 다 자기들끼리 알아서 할거야. 정경유착, 전관예우.’ 그렇지 않습니까?

실제보다 훨씬 과장된 불신이 우리 사회에 팽배해 있습니다. 그러니까 저도 때로 깜짝깜짝 놀랍니다. 남 못지 않게, 누구 못지 않게 권력을 비판하는 사람이지만 우리 일반 서민들이 가지고 있는 비합리적이고 과도한 권력에 대한 불신의 현상을 목격하면서 때로 공포를 느끼기도 합니다. 이렇게 불신의 벽이 높은 상황에서 과연 우리가 평화와 협력과 화해와 안정을 찾을 수 있을까? 일반 국민들에게 믿으라 하기 이전에 권력형 범죄자들에 대해서, 그 정의의 적들에 대해서 가장 강한 대가를 치르게 하고 정의의 적들은 결코 용납 받지 못한다 라는 것을 보여줘야만 신뢰가 회복되겠습니다. 그런 차원에서 저는 이 책을 통해서 그 사례들을 제시하면서 어떤 자들이 정의의 적들이며 그들이 어떻게 정의를 훼손하고 있으며 우리는 어떻게 해야 될까를 말씀 드리고 있습니다.

범죄도 종류가 여러 가지가 있습니다. 각 범죄마다 다 특징이 있고 차이도 있고 다양성도 있습니다. 그런데 어쨌건 보수주의적 관점에서 이야기 할 때 범죄에 대한 명제는 딱 하나 입니다. 무엇입니까? 미국이나 영국이나 호주나 캐나다나 영미권에서 흔히 볼 수 있는 표어가 있습니다. 캐치프레이즈가 있습니다. 무엇입니까? Crime does not pay. 범죄는 결코 이익이 되지 않는다 라는 것입니다. 이것을 사람들의 마음 속에 심기 위해서 국가가 정부가 경찰이 사회가 교육 시스템이 부단한 노력을 하고 있습니다. 무수한 사람들에게 그 말을 심어주기 위해서 입니다. Though Isn’t think about it. ‘절대로 범죄로 해서 이득 볼 생각하지마.’ 그 한 마디입니다. 그 단순한 명제의 신뢰를 얻기 위해서 끝까지 범죄자를 추적해서 잡아내기 위해서 살인 같은 범죄는 공소시효도 두지 않는 것입니다. 어떤 대가, 비용을 우리가 치르더라도 범죄 사건의 혐의자를 그들의 죄를 입증하기 위한 국가적 노력을 기울이는 것입니다.

여전히 제가 24년 동안 이 범죄 문제 이 경찰 분야에 종사해오면서 느끼는 것은 그런 태도를 우리 국가에서 저는 전혀 느끼지를 못하겠다 라는 것입니다. ‘범죄, 총량으로 접근 하면 돼이런 것입니다. 무슨 말씀이냐? 국민들한테 범죄 검거율 90%, 안심 하십시오. 괜찮습니다. 살인사건 검거율, 97%, 안심하십시오. 괜찮습니다이것이면 된다 라는 이야기 하는 것입니다. 디테일로 구체적으로 들어가면 진짜로 그럽니까? 그 통계가 현실 그대로 반영하고 있을까? 아니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러한 통계가 실제로 신뢰받기 위해서는 정말 매 사건 벌어질 때 마다 그 피의자가 누구고 피해자가 누구건 간에 상관없이 최선을 다 해서 이 사건의 진실을 밝히려는 국가적 노력이 있느냐의 문제겠습니다. 늘 턱턱 걸립니다. 적당한 타협이 보이고 적당한 포기가 보입니다. ‘적당히 웬만하면 여기서 마무리 짓지.’

우리는 정의란 무엇인가라는 미국 교수의 책이 백만 부 이상 팔리는 정의에 대한 갈구가 대중적으로 널리 퍼져있는 사회이면서도 아직까지 실제로 그 정의를 구현하고 실현하겠다 라는 구체적인 실천은 아직은 많이 부족한 그런 사회에 살고 있다 라고 저는 개인적으로 생각을 합니다. 그래서 범죄 문제에 있어서도 우리가 그 동안 잘해왔던 것, 함께 해왔던 것은 무엇입니까? 이미 범죄자임이 밝혀진 자들에 대한 돌팔매는 정말 잘 합니다. ‘찢어 죽일 놈, 사형시켜야 돼. 잘라버려야 돼진짜 잘 합니다. 그런데 과연 그것으로 범죄에 대한 응징, 범죄에 대한 예방, 범죄를 저지른 자들에 대한 예외 없는 천라지망 같은 검거의 손길 이게 이루어집니까? 확인된 자들에 대한 분노의 표출만 이루어지고 있을 뿐입니다. 정말 우리 모든 역량을 총동원해서 잘못 저지른 자들이 누구인지를 밝혀내고 그들이 아무리 완전 범죄를 하려고 하고 증거를 인멸하려고 하고 거짓말을 해대고 법 망을 피해 가려고 하더라도 철저하게 증거를 찾아내고 입증하려는 국가적 노력 그것은 아직까지 많이 부족하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정의의 적들에 대한 우리 국가의 태도, 결과가 밝혀진 이후에 비난하는 것으로 만족하지 말자 라는 것입니다. 철저하게 힘들더라도 어렵더라도 한 사건, 한 사건 마다 진실과 정의를 드러내기 위해서 노력해야 된다는 것입니다.

두 번째 수사기관의 직무상 범죄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딜레마입니다. 첫 번째 정의의 적들 범죄자들 제대로 검거하려면 법대로 하면 다 됩니까? 법이 얼마나 손과 발을 다 묶습니까? 그 법 다 지키고 그 규정 다 지키고 어떻게 범죄자 잡습니까? 범죄자는 법 다 어기고 마음대로 뛰어다닙니다. 심증은 가는데 물증이 없으면 어떻게 합니까? ‘심증이 가는 범죄자 스스로 자백하게 만들어야 합니다. 그러니까 우리가 조금 얘 때리고 해도 조금 봐줘동의하십니까? 참 어려운 문제입니다. 조금 확장시키면 안보에도 마찬가지가 적용이 됩니다. 안보가 중요합니다. ‘어쨌든 결과지향, 성과지향, 최종 목표니까 그 과정에서 다소간의 법이 어겨지거나 누군가 조금 억울한 누명 쓰거나 그런 것이 있더라도 궁극적인 목표를 위해서 그런 것 눈 감자. 어떻느냐라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정의의 문제가 대단히 불편하다는 것입니다.

제가 하나 에피소드를 말씀 드리겠습니다. 제 자랑입니다. 영국에서 유학을 마치고 돌아와서 당시 제가 경찰관이었습니다. 제복을 입고 있는 상태에서 제 아내에게서 전화가 걸려옵니다. 결혼한지 얼마 안 된 신혼이었고 장모님하고 처형을 태우고 면허를 얼마 딴 지 안 된 제 아내가 운전을 하고 있는 상황에서 접촉사고가 난 것입니다. 그런데 제 아내가 흥분합니다. ‘빨리 여기 좀 와 봐야겠어. 험하게 생긴 트럭 운전사가 우리 차를 들이받아 놓고서 미안하다는 이야기도 안 해. 겁나그래서 그 말만 믿고 달려갔습니다, 경찰 제복 입은 채로.

딱 갔는데 보아하니 그 트럭은 앞에 있고 제 아내가 운전하던 차는 뒤에 있는 것입니다. 트럭 운전사는 제복 입은 사람이 달려와서 그 여성 운전자랑 친분 있는 모습을 보이니까 긴장하는 것입니다. ‘저 운전자가 경찰 불렀구나. 자기 편이겠구나제가 가서 그 트럭 운전자한테 괜찮으십니까? 몸은 다치신 데 없으세요?’ 그러니까 괜찮다고 합니다. ‘차 뒤에 수리 하셔야 되겠지요?’ 그랬더니 안 해도 된다고 합니다. ‘그러지 마시고 괜찮으니까 제가 봤을 때는 뒤차 잘못입니다. 물론 과실을 몇 퍼센트, 몇 퍼센트로 나눠야 될지는 모르겠지만 어쨌든그러니까 제 아내 생각은 뭐냐 하면 주행을 하고 있는데 공사장이었습니다. 공사장 출구에서 예고도 없이 트럭이 나왔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자기가 어쩔 수 없이 그 트럭의 뒤를 받을 수 밖에 없는 상황이었다. 그러니까 잘못은 앞차가 있다. 이런 논리입니다.

우리가 정의라는 것을 상대적인 것으로 생각한다면 얼마든지 그 논리에 대해서 주장을 하고 소리를 내고 그 주장에 힘을 보탤 수 있는 제복의 위력을 보탤 수 있었겠습니다. 저는 그것이 정의라고 생각하지 않았습니다. 제가 죄송합니다. 제 아내가 면허를 딴 지 얼마 안 돼서 정확하게 교통법규를 알지 못하는 상황인데 분명히 차는 뒤차가 잘못했습니다저는 이제 엄청난 후 폭풍을 사실은 감수를 하려고 했습니다. 그런데 다행히도 장모님, 처형, 아내 모두 저한테 못마땅하기는 하지만 자네 말이 맞는 것 같네이렇게 넘어갔습니다.

그러니까 정의라는 것이 물론 모든 상황이 그렇게 큰 손해 없이 옳다는 것을 인정하고 넘어갈 수 있지는 않겠습니다. 어떨 때는 많은 것이 걸려있을 수가 있습니다. 정말 이것을 인정하는 순간 모든 것을 잃게 되는 순간이 있을 수도 있겠습니다. 유리하게 하고 싶은 순간이 있을 것입니다. 그게 우리 사회를 이렇게 힘들게 하고 있지 않습니까? 이중 잣대라는 것 입니다, 남이 하면 불륜이고 내가 하면 로맨스 입니다. 사실 참 어렵습니다. 힘듭니다. 그런데 그 힘들고 어려운 것들을 우리가 해나가려는 노력을 해야 되겠습니다. 잘 하지 못할 경우 상대는 그렇지 않은데 우리만 손해 보는 것 아닐까? 우리끼리라도 제 식구 감싸기, 끼리끼리, 우리가 하는 것은 모두 다 좋은 방향으로 상대방이 하는 것은 모두 다 나쁜 방향으로 몰았습니다.

여야간의 갈등, 정치분쟁, 지역감정 다 그렇지 않습니까? 정의에 대한 문제를 우리가 해결하지 못한다면 답이 없습니다. 어떻게 답이 나오겠습니까? 선거 혁명 하겠다. 참 무엇을 하자는 것인지요. 야당이 승리하면 정의가 자동적으로 오는 것입니까? 저는 아닌 것 같습니다. 지난 한 1, 2년 동안 우리 사회를 짚어보면서 참 많은 걱정이 듭니다. 많은 분들이 너무 많은 기대를 어떻게 보면 조금 혼란스러운 기대를 하고 계신다는 것입니다. 이쪽 편은 옳고 저쪽 편은 잘못했다는 반대쪽도 마찬가지입니다. 보수 또 지금 여당, 그와 관련된 분들은 야당은 속이고 북한 편들고 국가의 발전에 저해되고 그러니까 옳지 않아. 저들이 집권하면 큰일나그것은 정의가 아닌 것입니다. 우리만 옳다고 느끼는 아전인수인 것입니다. 시대정신과 국제적 기준인 절대적 정의에 대한 무시인 것입니다.

그 태도를 우리가 어떻게 벗어내 가느냐? 그래서 제가 수사기관 종사자이고 수사 전문가이고 경찰에서 오랫동안 있어왔지만 경찰의 잘못을 드러내고 스스로의 종아리를 때리는 심정으로 비판합니다. 그래서 처음에 오해 많이 받았습니다. 배신자 라는 소리 많이 들었습니다. 반역자 라는 소리도 많이 들었습니다. 시간이 흐르니까 일관된 모습을 계속 보여줬더니 지금은 많은 분들께서 사심이 없다는 것은 알겠어라는 반응을 보여주십니다. 하면 된다 라는 것 꼭 군대에서만 통용되는 것은 아니다 라는 것입니다.

정의에 있어서도 포기하지 않고 끝까지 해 나갈 때 신뢰가 올 수 있다 라는 것을 요즘 많이 느끼고 있습니다. 수사기관의 중요한 것은 권력이 아니라 신뢰다 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 검찰에 제가 자꾸 이야기 하는 것이 있습니다. 김학의 전 차관의 성 접대 혹은 성 학대, 성폭력 문제입니다. 단언컨대 저는 김학의 전 차관이 잘못했다고 생각합니다. 책임 있다고 생각합니다. 물론 법정에 가서 무죄 판결을 받을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법정까지는 가야 합니다. 그런데 제 식구인, 같은 식구인 검사들끼리인 현 검찰 조직은 이런 저런 이유를 둘러대면서 다른 성범죄에 대해서 사용하던 논리와는 전혀 다른 논리인 피의자의 변호인 역할을 하면서 김학의 차관을 아예 법정에 못 가게 합니다. 기소를 안 합니다. 무혐의 처분을 내립니다. 무엇을 얻겠다고 하는 것입니까? 제 식구에 대한 지금 당장의 이익만을 보고 하는 것 아니겠습니까? 그로 인해서 파생되는 국민들의 검찰에 대한 불신은 어떻게 하겠다는 것입니까? 얼마나 오랫동안 그 불신이 존재할 텐데 그 불신으로 인해서 발생하는 사회적 비용은 누가 감당할 것입니까?

우리가 그렇게 살아가고 있다는 가고 있다는 것입니다. 물론 기업도 경쟁 기업끼리 당신이 옳소그렇습니까? 월드컵에서 로벤이 멕시코와의 경기였습니까? 세 번 넘어집니다, 페널티 에어리어에서. 그리고 두 번은 페널티킥을 얻어내지 못하지만 마지막은 페널티킥을 얻어냅니다. 그래서 골을 넣어서 이깁니다. 경기가 끝나고 나서 로벤이 말합니다. ‘사실은 앞의 두 번은 헐리우드 액션이었어요라고 이야기를 합니다. 약 올리는 것도 아니고 그렇습니까? 왜 그 당시에 이야기하지 않았습니까? 자기가 반성하지 않았습니까? 그러다 보니까 그 다음 상대팀 코스타리카였습니까? 공식적으로 요청합니다. ‘로벤에 대한 경고와 경계령을 발의해 주십시오.’

신뢰라는 것은 그리고 정말 내게 불리하더라도 우리에게 불이익이 온다 하더라도 이야기 할 수 있는 우리 이종수 선수가 한번 그런 모습을 보여준 적이 있었습니다. 이종수 선수가 카타르의 클럽 소속이었는데 아시안컵이 아니라 뭡니까? 클럽 간 아시안 챔피언스 리그입니다. 중요한 경기에서 자기 손에 공이 맞은 것입니다. 그런데 심판이 못 봤습니다. 자기가 손을 듭니다. ‘핸들링 반칙을 했습니다자기 선수들에게 따돌림 당했습니다. ‘너 때문에 우리가 졌어이종수 선수는 그 다음에 인터뷰를 하면서 감수했습니다, 당연히. 하지만 제 양심이 도저히 그것을 넘기지 못하겠더라고요.’

무엇인가 그런 옳음에 대한, 이익보다는 옳음을 선택하는 그 모습들이 조금 우리 사회에 많이 생겨날 때 결국 우리가 힘들어 보이지만 정의라는 것을 만들어낼 수 있지 않을까 라는 그런 말씀을 조금 드리고 싶습니다. 그래서 정의의 적들과의 싸움은 절대로 쉽지 않다. 어떻게 본다면 정말 모든 것을 건 싸움일수도 있다 라는 것입니다. 정말 정의로워진다면 잘못된 것은 잘못되었다고 드러나고 법을 어긴 자가 처벌을 받게 된다면 조금 무서운 이야기입니다, 사실은. 특히 우리 기업 경영을 하시는 입장에서 지금 당장 모든 기업의 활동을 다 따져서 여하한 법 위반 행위가 나타난다면 모두 처벌하겠다. 못 삽니다. 기업 활동 하지를 못 합니다. 그것은 대단히 무서운 이야기가 됩니다. 우리가 그런 이야기를 하는 것은 아닙니다. 그렇습니까? 가급적이면 모두가 법을 준수하면서 경쟁하고 기업 활동을 할 수 있는 그 최종 목표를 향해서 우리가 계속적으로 그 방향으로 노력해 나가자 라는 이야기입니다. 그렇게 되었을 때 결국 모두에게 그 공정성은 실력이 이기고 노력이 이기고 성실함이 보상받는 사회가 될 것 아니냐 라는 것입니다.

어렵습니다. 하지만 불가능하지는 않습니다. 작은 도전들, 작은 실패들을 딛고 작은 성공들, 작은 승리들을 챙겨나갈 때, 그 트로피들을 하나씩 쌓아 나갈 때 결국 우리는 자신감을 얻을 수 있고 큰 도전, 큰 승리를 향해 나갈 수 있다. 그런 말씀을 드리고 싶습니다. 그래서 이 정의와의 싸움은 소수의 문제가 아니고 어떤 수사 기관이나 공무원이나 국가 기관 만의 역할은 아니다. 우리 모두가 그가 누구이건, 민간에 있건 관에 있건 또는 학생이건 누구이건 간에 각자의 몫이 있다. 각자가 위치한 곳에서 힘들고 어렵더라도 이익보다는 옳음을 선택하는, 조금 손해가 나더라도 옳음을 택하는 입니다.

학교에서 우리 아이가 싸움을 하고 왔다. 학교에서 전화가 왔다. 댁의 자녀가 친구를 때렸습니다. 상당수의 어머니들이 내 아이는 절대로 남의 아이를 때리는 아이가 아닙니다. 무엇인가 맞은 아이가 잘못을 했겠지요바로 그게 자동적으로 나오는 모성애입니다. 그런 부분들을 한 단계 낮추고 내 아이가 다른 아이에게 폭력을 통해서 아픔을, 상처를 남겼군요. 이유야 어찌 되었건 잘못했습니다. 자세한 이야기는 가서 제가 듣겠습니다. 살펴보고 따져보고 내 아이가 잘한 부분과 잘못한 부분 그리고 피해 입은 아이가 느끼고 있을 상처부모님부터 정의로워지셨을 때 비로소 우리 아이들이 학교에서 세상은 썩었어. 부모가 강하면 자녀도 나쁜 짓하고도 처벌 받지 않고 부모가 약하고 힘 없으면 피해입고도 오히려 더 불이익 받고 야단 맞고 쫓겨가야 돼이런 정의가 존재하지 않는다 라는 절망과 불의에 대한 학습 이게 일어나지 않도록 해주는 역할 얼마나 큽니까. 그러니까 부모님이라는 역할과 권한, 지위는 정말 저는 대단하다고 생각을 합니다. 그 노력들이 결국 사회를 바꿔나가지 않겠는가?

그래서 앞서 제가 말씀 드렸던 우리 젊은 친구들의 질문 내지는 어떤 항의 선생님, 세상에 정의가 어디 있습니까? 거짓말 하지 마십시오라는 내가 노력해 봤지만 안 되던데요. 나만 손해보고. 이제는 안 하려고 합니다. 포기하려고 합니다그런 선언들입니다. 그 앞에서 제가 드리는 우화입니다. 야구, 물론 다른 곳에서도 다 이런 이야기가 있겠습니다. 월드컵 때도 브라질이 독일에 4:0, 5:0 지고 있을 때 관중들이 일어나서 나가는 모습들이 보였습니다. 안타깝고 아프기는 하지만 저는 그런 태도는 반대합니다. 야구도 마찬가지인데 예를 들어 두산베어스가 LG트윈스와 경기하는데 9회 말 투아웃, 이제 아웃 하나만 당하면 끝인데 3:0으로 지고 있다. 첫 타자, 둘째 타자 힘 없이 나갔다. ‘에이, 남들보다 빨리 주차장 가서 혼란 일어나기 전에 가야지저는 그게 올바른 관객의 태도가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그 날은 여전히 그렇게 스트라이크, 아웃, 쓰리아웃 당하고 질 수도 있겠습니다. 그 다음에 또, 그 다음에 또 입니다. 왜냐. 이런 기적이 일어납니다.

2008 10 16일 날 미국 프로야구 메이져리그, 아메리칸리그 챔피언십 시리즈 7004선승째,  템파베이 레이스하고 보스턴 레드삭스 간의 템파베이 레이스가 게임 스코어 3:1로 이기고 있고 이 게임만 이기면 4:1이니까 끝나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 경기는 7회까지 7:0으로 템파베이가 이기고 있었습니다. 7, 이제 2회만 남았습니다. 7:0 이제 끝난 것 아닙니까? 일어서서 나가는 사람들이 생깁니다. 7회 말에 4점을 얻습니다, 보스턴 레드삭스가. 7:4가 됩니다. ‘!’ 나가는 사람의 뒤통수에 들립니다. ‘돌아갈까? 에이, 7:0인데 그거 뭐 안타나 쳤겠지’ 8회 말에 3점을 뽑습니다. 7:7 동점이 되었습니다. 9회 말에 끝내기 안타로 8:7의 기적과 같은 정말 말도 안 되는 역전 승을 보스턴 레드삭스가 합니다. 7회 말, 7회 초 7:0의 스코어를 9회 말에 8:7로 뒤집은 것입니다.

그런 기적, 만약에 보스턴 레드삭스의 팬이었다면 평생에 한번 있을까 말까 한 그 기적을 목격했다는 것, 그렇습니까? 얼마나 값진 경험이고 평생 잊지 못할 추억 아니겠습니까? 특히 포기하지 않고 내가 끝까지 남아있었다 라는 그래서 내가 이 기적을 볼 수 있었다 라는 똑 같은 입장권 내고 들어왔던 사람들, 7:0이라서 포기하고 갔던 사람들 얼마나 배가 아팠겠습니까. 그렇습니까? 언제 그런 경험을 해 보겠습니까? 그게 우연이었겠습니까? 그 날 하루만 에이, 귀찮은데 그냥 끝까지 앉아있지 뭐이런 사람이 그 기적을 목격했습니까? 아니라는 것입니다.

하인리히 법칙이라는 게 있습니다. 한번의 엄청난 일이 일어나기 전에는 26번의 조금 중대한 일이 일어나고 그 26번의 중대한 일이 일어나기 전에는 3,000번의 아주 작은 일이 일어납니다. 인간에게도 똑같습니다. 매일 우리가 지고 또 지고 지지만 9회 말 마지막 아웃카운트가 끝날 때까지 끝난 것은 아니다 라는 요기 베라의 말을 떠올리며 끝까지 있었던 것을 습관화 하는 사람만이 언제 올지 모를 이 엄청난 기적을 누릴 권리가 있는 것입니다.

세상도 그렇다고 저는 생각을 합니다. 매일 불공정에 당하고 매일 비겁한 행동에 좌절 당해도 언젠가는 승리가 올 거야 라는 믿음을 가지고 끝까지 노력한 사람이 마지막 순간에 정말 어느 누구도 느끼지 못할 희열과 행복을 느끼는 것 아니겠느냐. 그것이 인생이라고 저는 생각을 합니다. 정의도 똑같다고 생각을 합니다.

과연 이 세상에 정의가 없습니까? 저는 반문을 합니다. 과거 일제 36년 동안 지금보다 훨씬 더 길었던 그 불의의 시간 동안 우리 민족이 정말 세상에 정의는 없어. 일본이 이겼어. 우리 민족은 이제 끝이야라고 다 받아들이고 일본에 복속되었다면 대한민국이 현재 있을 수 있습니까? 김연아가 있을 수 있습니까? 포기하지 않았지 않습니까, 우리 조상들은. 그 깜깜한 절망의 36년 동안을 끝까지 백의민족의 흰 한복을 입고 아리랑을 부르면서 몰래 한글을 자녀들에게 가르쳐주면서 계속 이어나갔던 그 힘이 결국 지금 우리가 아무리 73.8%의 국민이 불공정하다고 하고 불행하다 라고 이야기 하고는 있지만 다른 수 없이 많은 나라들에서 부러워하는 대한민국이 되었지 않습니까? 지금 우리가 겪고 있는 불공정의 문제, 불의의 문제 마찬가지 라고 생각을 합니다. 포기하지 말자는 것입니다.

마지막으로 그래서 그럼 우리가 어떻게 살아야 될까 라는 문제입니다. 정의라는 문제와 결코 무관하지 않다. 정치적 이념이나 지역이나 모든 것들에도 불구하고 어떤 차이와 상관없이 많은 국민들에게서 존경 받았던 분, 김수환 전 추기경께서 선종하시면서 남겨주신 말씀이 있습니다. ‘어떻게 살아야 합니까?’ 라는 질문에 대한 답입니다. 김수환 추기경님께서 당신이 이 세상에 태어났을 때 당신은 울었고 주변 모든 사람은 미소 지었습니다. 귀엽고 예쁜 아가의 탄생, 그렇습니까? 그런데 정작 본인은 웁니다. 그러면 당신이 이 세상을 떠날 때는 당신만 미소 짓고 주위 사람들은 눈물을 흘릴 그런 삶을 사십시오라는 그런 말씀을 남기고 정말 그 분은 미소 지으면서 떠나가셨습니다. 그런데 무수하게 많은 사람들은 눈물을 흘렸습니다. ‘왜 벌써 떠나십니까? 당신은 더 계셔야 합니다

어떻게 해야 그렇게 됩니까? 김수환 추기경님처럼 꼭 많은 사람들에게 알려지는 그런 선행과 성인 같은 업적을 쌓아야 됩니까? 저는 그게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비록 가족만이라도 아니면 세상에 살아가면서 같이 경험했던 아주 소수의 주변 사람들 만이라도 이 사람이 떠남을 아쉬워서 자연스러운 눈물이 흐를 수 있는 그런 삶, 본인은 나 할 것 다 했어. 미련 없어. 이 세상 한바탕 소풍 잘 끝났지 뭐미소 지으면서 떠날 수 있는 그런 삶, 그런 삶을 산다면 그 삶에는 정의가 반드시 있다 라고 저는 믿습니다. 왜냐. 정의보다는 옳음보다는 이익을 택하고 살아간 사람들에게는 아까 말씀 드렸던 보여 드렸던 우리 대뇌의 역할 때문에 섬엽의 자극 때문에 응어리가 남아있게 됩니다. 무엇인가 욕구의 불만이 있게 되고 아쉬움과 미련과 분노가 남아있게 됩니다. 그래서 결코 미소 지으면서 떠날 수가 없습니다. 그러한 이익의 선택은 왜 생깁니까? 돈에 대한 집착, 지위, 경쟁 입니까? 너무 거기에만 매몰되어 살다 보면 그렇게 되겠습니다.

마지막으로 다시 처음의 질문으로 돌아갑니다. 우리 아이들에게 무엇을 가르쳐야 할까? 무엇을 가장 중요하게 생각해야 할까. ‘일단은 취직하고 먹고 살고 이겨내고 남에게 뒤쳐지지 않아야 해를 앞에 세우고 강조해야 할까? 그렇게 살아갔을 때 이 아이들, 내 자녀, 내 손자가 마지막 이 세상을 떠날 때 미소 지으며 갈 수 있을까? 그 사람 주변의 많은 사람들은 눈물을 흘려 줄 수 있을까? 저는 늘 그 생각을 우리 김수환 추기경님 때문에 하고 살아가고 있고 우리 아이들을 그렇게 대면하고 있습니다. 한번 그런 생각을 해봤으면 말씀을 드립니다. 고맙습니다.

 

 

손자영 연구원 (jyson@ips.or.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