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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2015년 3호] 경영자독서모임: 경영은 사람이다
발간일 2015-10-13 첨부파일 150714_MBS 40기 14회차_ 이병남 LG인화원 원장1.jpg

[경영자독서모임]

 

경영은 사람이다

 

(이병남 LG인화원 원장)

 

이 원고는 2015 7 13일 이병남님의 MBS 강의를 바탕으로 서울과학종합대학원대학원(aSSIST)와 산업정책연구원(IPS)에서 작성하였습니다.

 

오늘은 제 책을 중심으로 해가지고 여러분들과 제 이야기를 좀 나누는 그런 시간이 되겠습니다.

. 제가 작년 12월에 이 책을 출간했는데 생각은 오랫동안 했었습니다. 그런데 실제로 책으로 이렇게 쓴 데는 한 1년 가까이 걸렸습니다. 그것도 역시 제가 대기업에 임원으로 재직하면서 그렇게 할 수 있었던 것은 그 동안 10여 년 쭉 여러 차례 LG내부에서 강의를 하면서 축적된 자료들이 기본적이 데이터로 축적이 되어 있어서 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그러니까 회사사장이 어떻게 저런 책을 다 쓰나 혹시 궁금해하신다면 하루아침에 쓴 것은 아니다 말씀 드리겠습니다. 또 저 나름대로는 1980년에 미국에 유학을 가서 95년에 귀국을 했으니까 제가 총 15년을 미국에 살았습니다. 그 기간은 대학원생 이후에 교수로 생활을 했고 그때의 생활은 여러분들 들으셨겠지만 기본적으로 ‘Publish or perish’ 라는 그런 게임의 룰 속에서 살았었습니다. 그러니까 주로 실증연구를 많이 했습니다. 계량분석을 많이 했고 주로 데이터를 분석하는 그런 작업을 통해서 미국에서 논문을 내고 그랬었습니다. 95년에 15년 만에 귀국을 해서 오랜만에 저는 21년째 LG에서 일하고 있습니다.

그 동안 제가 공부하면서 또 실무에서 일을 하면서 여러 가지를 겪고 또 거기서 생각하고 고민하고 해답을 찾고 그런 과정들을 저 나름대로 정리를 했다고 말씀을 드릴 수 있겠습니다. 그래서 개인적으로 저의 화두가 시장, 기업, 인간이라는 화두에 제가 천착하게 된 것은 상당히 오래됐습니다. 95년에 15년 만에 귀국을 해보니까 한국도 많이 바뀌었고 저 자신도 많이 바뀌었다는 느낌을 가졌었습니다. 상당히 좀 의아스럽게 생각했던 것 중 하나가 공산주의인 중국이 자본주의인 한국보다 훨씬 자본주의적이다, 우리나라는 평등의식이 지나쳐서 사업하기 힘들다. 우리나라 사람들은 사회주의적인 의식이 대단히 강하다, 이런 이야기들이 여기저기서 있었습니다.

그런데 저는 마음속으로부터 그런 주장이 전혀 와 닿지 않았습니다. 저도 제가 미국에서 15년 살 때, 한국사람들이 있는 곳 어디서나 사업이 되고 가게를 하고 자영업을 하고 그 누구보다도 우리가 어떻게 보면 시장친화적인 사람들이다. 저는 그런 생각들을 했습니다. 참 이상하다 왜 그런 주장들을 할까 그런 생각들을 하게 됐고 제가 귀국한지 2년 후에 외환위기가 터졌습니다. 1997 8월에 달러 원 달러 환율이 800원이었습니다. 3개월 후 1997 11월입니다. 제가 런던 출장 중이었습니다. 원 달러에 2천원이 넘어갔습니다. 그때 많은 사람들이 걱정을 했습니다. 내년 3월에 우리 다 굶어 죽을 것이다. 왜냐하면 hard currency가 없으니까, 식량을 사올 수도 없고 우리 식량 자급률은 이미 많이 떨어져서 우리가 생산한 걸로 우리가 먹을 수 없는 상황이고 달러가 없으니까 기름 사올 수가 없고 그리고 진짜 춘곤기, 엄청난 시련을 갖고 오자 그런 걱정을 했었습니다. 그게 97 11월입니다.

그러면서 저희가 이제 외환위기 속에서 LG도 살아남기 위해서 사업구조조정을 하지 않을 수 없었고 그 과정에서 인력구조조정이 당연히 따라왔고 그러면서 재무구조조정을 통해가지고 저희가 이자보상배율 1이하의 상태에서 빨리 벗어나야 했습니다. 당시 5대 그룹은 모두가 이자보상배율이 1미만이었습니다. 즉 영업이윤을 벌어가지고 이자를 채권이자를 못 내는 상황이었습니다. 5대 그룹은 사실상 부도상태였습니다. 그때 김대중 정부가 5대 그룹 자체해결원칙이라는 것을 그때 가지고 있었습니다. 5대 그룹은 부도 안 낼 테니까 즉, 은행에서 이제 어음 돌리면 끝이지 않습니까? 그렇지 않습니까? 부도 안 낼 테니까 알아서 해결해라 그런 원칙이었습니다.

오래 전 지나간 이야기지만 제가 이런 말씀을 드리는 이유는 그 과정에서 우리 역시 사업구조조정, 거기에 따라 인력 구조조정을 하면서 많은 사람들이 직장을 잃는 혹은 직장을 옮기는 과정들을 거치면서 파업이 있었습니다, 태업도 있었고 기물파괴가 있었고 그런 것들 제가 직접 다 목격을 하면서 기업이 역할이 과연 뭔가? 그런 아주 실질적인 고민을 하기 시작했습니다. 대부분의 사람들이 회사에서 일을 합니다. 큰 회사, 작은 회사할 것 없이, 기업에서 일을 하는 사람들, 주위 조직구성원들을 어떻게 봐야 하는 걸까 이런 고민들이 본격적으로 시작된 게 사실은 97년 외환위기가 한 계기가 됐습니다. 그래서 그 이후로 계속 저의 관심사는 시장기업인간이었습니다. 그러면서 이거를 어떻게 전반적으로 내가 이해를 할 수가 있을까 이런 고민 속에서 제가 일을 해오다가 5년 후에 이제 그룹의 당시 회장실 라고 불렸는데 나중에 지주회사가 됐습니다. 거기 인사팀장으로 발령이 났습니다.

그래서 그룹전체의 인사업무를 실무책임자로 부사장으로 제가 8년 동안 그룹의 인사담당 부사장을 했습니다. 그러면서 여러 가지 일을 하면서 제가 이제 알게 된 것이 소위 생태적 관점이었습니다. 그전까지는 저는 시장하고 생태적 관점하고는 어떤 관계가 있는지 전혀 몰랐습니다. 생태적 관점을 접하게 되면서 시장을 좀 더 우리가 제대로 이해할 수 있는 방법이 여기 있지 않을까? 이런 생각을 하게 됐습니다. 그러면서 제가 특히 인사업무를 하면서 인사와 관련된 아주 복잡하고 어쩌면 모순으로 보이는 그런 상황 거기에서 제가 이제 접하게 된 게 이제 역설적 접근이었습니다. paradox입니다.

그래서 이 책은 저의 오랜 저의 천착, 제가 천착해온 관심사, 시장기업인간을 과거와는 조금 다른 관점 조금 다르다면은 하나는 생태적 관점 그 다음에 또 하나는 역설적 접근법으로 나름대로 제가 풀어보려고 한 노력을 정리를 했다고 말씀을 드릴 수가 있습니다.

어떻게 보면 사람에 대한 관심은 제가 여기서 사람이라는 것은 우리 모두 사람이기도 하지만 특히 회사에서 일하는 사람들 노동하는 사람들에 대한 관심입니다. 전태일 열사가 있습니다. 1970년에 분신자살을 했습니다. 전태일 열사는 20대 초반에 저렇게 자기 스스로를 희생을 하면서 우리 사회의 어떤 균형적 발전에 기여를 했다고 저는 생각을 합니다. 노동권과 인권에 대해서 보다 많은 사람들이 관심을 가질 수 있는 계기를 만들어줬다는 것입니다. 저는 73학번입니다. 그래서 저 일이 생겼을 때 저는 전혀 몰랐습니다. 고등학교 때였습니다. 73년에 대학에 입학하고 나서 선배들 통해서 이제 알게 됐습니다. 한편으로는 충격 이기도 했지만 한편으로는 대체 뭘까? 이제 이런 생각을 하면서 대학시절의 제가 4년을 되겠습니다.

제가 전공은 경제학이었는데 부전공은 수학이었습니다. 저는 전공, 부전공은 별로 그렇게 그 당시에는 재미가 없었습니다. 저는 경제학과 수학이 재미있어진 것은 유학간 이후입니다. 그대신 저는 역사, 철학, 문학 쪽 과목을 굉장히 많이 들었습니다. 제가 서강대학교를 다녔습니다. 그때 역사, 철학, 문학 이런 과목들을 주로 수강을 했고 그런 과목들은 전부 예외 없이 올A를 받았습니다. 제가 전공인 경제학과 수학은 성적이 아주 안 좋았습니다. 김형효 교수님이라고 철학과 교수님인데, 아직 생존해계십니다. 독일에서 공부를 하고 돌아오셔가지고 거의 가장 학생들이 좋아하고 존경하는 그런 철학교수셨는데 저도 저분 강의를 여러 강의를 제가 공부를 했습니다.

제가 그런 70년대 초반 그런 사회분위기, 대학분위기에서 여러 가지로 힘들어하고 어려워하고 이럴 때 이 선생님이 저한테 자네 정말 학문할거냐, 할거면 마음을 좀 차게 가져라. 이제 그런 어드바이스를 주셨습니다. 저한텐 상당히 충격이었습니다. 그러니까 제가 아직도 안 잊어버리고 있습니다. 대학교 때 한마디 해주신 것인데 그러면서 아, 이게 뭔가 그런 시대 상황 속에서 어려움 속에서 내가 앞으로 무슨 생각을 하고 어떻게 살아야 할까? 이런 생각을 하는데 굉장히 자극이 주셨습니다.

그런데 제가 막상 대학을 졸업하면서 제가 대우실업에 입사를 했습니다. 대우실업에 입사를 해서 좀 다니는데 영 아닌 것 같았습니다. 그래서 제가 아무래도 공부를 해야 되겠다 이런 생각을 하던 차에 모교에 대학원 시험을 봤는데 제가 책에서 고백했듯이 제가 낙방을 했습니다. 저는 대단한 충격이었습니다. 그때 저를 떨어뜨리신 분이 이분입니다. 김병주 교수님이신데 지금 서강대학교 경영학 교수이십니다. 한국에 금융계, 금융 쪽의 학문적인, 또는 제도적인 엄청나게 기여를 하신 분입니다. 딱 이렇게 이야기를 하셨습니다. 너 정말 공부할 생각이 있냐, 얼쩡거리지 말고 mainstream으로 가라 그때 그렇게 이야기하셨습니다. 하여간 그런 투로 저한테 엄청난 충격을 주셨습니다. 그래서 제가 그때 아주 독이 올랐습니다. 어디 두고 보자, 그래서 대학교 때 저희 저 두 분의 은사 분이 오늘의 저를 있게 해준 참으로 감사한 분들입니다.

제가 왜 강의 서두에 저의 개인적인 이야기를 하는가 혹은 제 책에서도 중간중간에 저의 개인 사를 이야기를 했는가, 저는 사회과학을 공부하는 사람입니다. 기본적으로 사회과학, 특히 미국식 사회과학의 주류에서 어떤 이론적인 논리적인 합리성에 지나치게 매달리다 보니까 실제로 사회과학이 대상이 사회와 사회 속에 사람에 대한 관심과 애정이 상당히 저는 문제가 있다고 생각을 하는 편입니다. 그래서 내가 사회과학에 대한 책을 쓰는 마당에서 내 개인적인 삶과 내 나의 생각이 들어가지 않으면 이것은 의미가 없다. 이런 생각을 해서 책의 여기저기에 조금씩 저의 개인 이야기를 썼습니다.

그리고 한 인간의 삶이라는 것은 그 사람의 내면적인 어떤 동기, 혹은 욕구 그런 여러 것들이 함께 작용하면서 만들어지는 것이라고 생각을 하기 때문입니다. 미국에 유학을 가지 않았습니까? 가서 오하이오 주립대에서 석사과정을 하는데 저를 알아봐주신 스티브 힐스 교수님이 있으신데 아주 지금 연로하십니다. 이분이 제가 석사과정 2년을 석사학위를 받고 미네소타 대학으로 박사과정을 하러 떠날 때 저한테 해준 말씀입니다. ‘가만 보면 너도 나같이 굉장히 이상주의적인 기질이 있다. 너 그런데 조심해야 된다. 이상주의를 가진 사람은 좌절하고 현실에 대해서 아주 시니컬 해질 수 있다. 세상이 다 그런 것이다. 해봐야 그렇지 뭐, 너 그거 조심해.’ 이렇게 말씀해주셨습니다. 그러니까 네가 그런 기질이 있으니까 그 부분에 대해서 네가 의식을 하고 그렇게 시니컬해지지 않도록 이렇게 하라는 당부말씀을 주셨는데 33년 전입니다. 제가 잊을 수가 없습니다. 그 이유를 제 삶의 하나의 지침이 됐으니까 말입니다.

저는 회사에 와서 사람을 뽑을 때 혹은 어떤 포지션에 승진이나 혹은 전배에 관련된 인사적 의사결정의 과정을 제가 프로세싱을 하면서 가장 제가 주의를 기울인 것이 바로 이 사람이 시니컬한가, 아닌가 그런 생각을 하면서 시니컬 한 사람은 절대로 안 뽑습니다. 제 아무리 똑똑하고 천재 같아 할지라도 조직에 해가 됩니다. 자기자신에 해가 되고 조직에 해가 됩니다. 그래서 이 시니컬하다는 것은 사실은 약함의 표시기도 합니다. 약하기 때문에 자기가 강하지 못하기 때문에 그런 경우가 많습니다.

그래서 제가 미네소타 대학으로 갔습니다. 미네소타 대학을 가서 공부를 하는데 제가 별로 관심도 없는 공부를 여러 가지를 많이 해야 했습니다. 이제 저는 학교 잘못 선택했나 보다 이러고 이제 고민하고 있을 때 저의 박사과정 지도교수 퍼스튼 교수님을 만났습니다. 이 분께서 이런 이야기를 저한테 해주셨습니다. ‘Knowledge breeds enthusiasm.’ 보통은 우리가 enthusiastic이 열정적이면 뭔가 된다 그러지 않습니까? 열정적이어야지 공부도 열심히 하고 일도 열심히 할 수 있고 이분은 반대로 이야기하셨습니다. knowledge breeds enthusiasm, 뭘 알아야 열정이 생긴다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너 뭐 관심이 있느니 없느니 그러지 말고 일단 해봐, 공부를 해봐, 우리 학교 커리큘럼이 다 50년 전통 속에서 만들어진 커리큘럼이니까 한번 해봐라. 

knowledge breeds enthusiasm, 그러니까 뭘 제대로 깊이 파고들고 깊이 알려고 하지도 않으면서 상대방을 진정으로 이해하려고 시간과 노력을 들이지 않으면서 이 사람은 이래서 안되고 저 사람은 저래서 안되고 예를 들면, 그러면은 그 조직이 제대로 될 수가 있겠습니까? 우리가 인사를 하는데 가장 중요한 것은 그 사람을 아는 것입니다. 알지 못하고 평가할 순 없습니다. 그런데 우리가 알려면은 시간과 노력과 정성이 들어가야 합니다. 알아야 그 다음에, 아 이렇구나 라고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거기서 열정이 생긴다는 것은 knowledge breeds enthusiasm를 저한테 가르쳐주신 분입니다.

이런 과정을 통해서 제가 2012년에 모교에서부터 굉장히 영광스러운 상을 받게 됐습니다. 저희 석사과정 지도교수였던 스티브 힐즈 교수님께서 오하이오에서 이 시상식에 참가하겠다고 와주셨습니다. 참 감사합니다. 거기서 이제 선생님이 저한테 해주신 말씀이 너의 가장 탁월한 점은 32년이 지나 아직까지도 너는 시니컬하지 않구나, 그런 말씀을 해주셔서 제가 정말 참 뭉클했었습니다.

이런 과정 속에서 제가 공부를 마치고 또 미국에서 교수생활을 쭉 하다가 1994년에 LG에서 당시 구자경 명예회장의 마지막 해였습니다. 그때 본인만 세계 우량기업들을 가서 보고 배워가지고는 안되겠다. 우리 사장단들이 전부 가야 되겠다 해서 갑작스럽게 LG 전체의 사장단, 회장단들이 두 그룹으로 나뉘어서 1, 2차로 미국에 당시 우량기업들 벤치마킹 하러 오시게 되는데 어떻게 저한테 이 의뢰가 들어왔습니다. 프로그램을 전체를 다 디자인 해달라는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저는 아주 신이 났습니다. 한국의 LG그룹의 전체 사장단, 회장단들이 전부 미국의 공부하러 온다는데, 제가 당시 그 주제 케이스 스터디를 2, 3년째 하고 있었습니다. 제가 컨택하던 회사도 다 있으니까 이분들을 모시고 일주일씩 두 번에 걸쳐서 쭉 투어를 했습니다. 94년도 일입니다. 21년 전 일입니다. 이게 계기가 돼서 저는 95년부터 LG에 와서 일을 하게 됐습니다.

그러면서 제가 쭉 생각했던 시장이라는 것, 그 다음에 기업이라는 것 기업 속에서 일하는 사람들에 대해서 제가 생각했던 것을 같이 여러분들과 나눠보고자 합니다.

이 모로코의 고도인 마라케시의 제나 엘프나 라는 곳입니다. 제나 엘프나라는 곳은 죽은 자들의 집합소라는 의미도 있습니다. 또 세상 제일 끝에 있는 모스크 이런 뜻도 있다고 합니다. 제가 마라케시를 직접 가보지는 못했습니다. 그러나 관심 있어서 읽고 또 영상을 보고 이렇게 해서 굉장히 친숙해졌는데, 제나 엘프나가 시장으로써의 기능을 한지는 천년 정도 됩니다. 천년 동안 같은 장소에서 밤낮으로 저렇게 사람들의 삶이 일구어내는 그러한 장소의 하나의 대표적인 예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저는 여기서 시장의 특성을 봅니다. 사람들에게 즐거움을 주는 것, 사람들에게 축제와 같은 기쁨을 주는 것, 사람들이 필요한 것을 서로 조달할 수 있게 해주는 것, 그런 것이 시장이 아닌가 이런 생각을 하게 됩니다.

여러분들 익숙하십니까? 삼국유사에 나와있는 부분이지 않습니까? 우리 이제 삼고사, 고조선 관한 이야기지 않습니까? 그러니까 기원전으로 따지면 서기로 2333년 이지 않습니까? 그렇지 않습니까? 이제 고조선의 건국을 보고 있지 않습니까? 환인, 환웅 이렇게 나옵니다. 홍익인간이 나옵니다. 그 다음에 세사에 내려와서 신시(神市)라고 도읍을 정했다고 나옵니다. 그래서 세상을 다스리고 교화했다. 특히 이 신시에 주목을 합니다. 이거 삼국유사고 삼국유사는 그래도 전통사학계에서 무시는 못합니다. 전통사학계에서 인정하지 않는 환단고기라는 책이 있지 않습니까? 거기는 이 고조선 우리 삼고사역사 훨씬 자세하게 나옵니다. 거기에는 신시라는 용어도 나오지만 치시교역이라는 표현이 나옵니다. 시장을 치시, 시장을 설치해서 교역을 하게 함으로써 사람들이 잘 살게 됐다. 이런 구절이 거기는 나옵니다. 환단고기를 제 책에다가 쓰기가 좀 그래서 전통사학계가 언어인정을 안 하기 때문에 그래서 아쉽지만 이제 삼국유사를 넣었습니다. 삼국사기에는 아예 고조선 이야기를 다루질 않았습니다. 서기 2000, 그러니까 기원전 20세기 그러니까 고조선건국을 우리가 서기 기원전 2333년 이라고 보는데, 그 시기가 되게 어떤 시기였냐? 고대 그리스 문명이 시작되는 시깁니다. 그리스 문명, 중국의 황하문명하고 비슷한 그런 시기가 되겠습니다.

그리스는 기원전 2000, 2500년 그때 크레타문명 이후에 미케네 문명 이런 것들을 그리스 신화, 이거 신화다, 허구다, 그렇게 했습니까? 아닙니다. 역사로써, 자기들이 소중하게 여기고 발굴을 통해서 다시 검증하고 그렇지 않습니까? 그리스 신화가 그냥 신화가 아니었다. 허구가 아니었다, 실제로 존재했던 인간사의 이야기였다. 라는 것을 계속 만들어나가지 않습니까? 그렇게 왜 우리는 그렇게 못합니까? 왜 단군 신화 라고 그냥 신화, 신화가 얼마나 중요한 것인데 말입니다. 미신은 문제일지 모르지만 신화는 굉장히 중요한 것입니다.

프로이드 융 적인 관점에서 보더라도 Archetype이라는 용어 들어보셨습니까? 인간 내면에는 영혼의 근본적인 어떤 성향들을 신화들을 통해서 우리가 표현하는 것들이기 때문에 사실 신화는 굉장히 중요한 것입니다. 그러나 이 고조선의 실체, 실제 사실 실제로 그때 존재했었다는 것은 고고학적으로 이미 많이 나와있지 않습니까? 그래서 제가 여기서 주목한 것은 신시에 대해서는 사실 학자들간의 좀 의견이 있습니다. 신시의 의미에 대해서는 신시, 시라는 것이 어떤 요즘과 같은 도시기능 이런 기능으로서 해석 된 것은 아주 근래의 일이라는 이런 표현도 있습니다.

그러나 어쨌든 우리 상고사에서도 시장의 이 긍정적 기능에 대해서 어쩌면 제나 엘프나보다 훨씬 더 오래 전에 이미 우리에게도 그런 기록이 있고 그러한 기록이 결국 우리들이 시장을 얼마나 소중하게 생각하게 했느냐 우리가 얼마나 시장친화적인 민족이냐 오히려 저는 그런 주장을 하고 싶은 것입니다.

시장 그러면 우리가 보통 아직도 대학에서 경제원론 가르칠 때 가장 기본적인 모델이 수요공급모델이지 않습니까? 수직 축에서 가격이 올라가면은 수요는 떨어지고 공급은 늘어나고 그렇지 않습니까? 가격이 올라가면 공급은 늘어나고 수요는 떨어지고 또 가격이 내려가면 그 반대현상이 일어나고 어디선가 균형점을 찾을 것이다. 거기서 가격과 거래량이 결정이 된다. 이런 기본적인 수요공급 모델입니다.

이 수요공급모델 사실은 이게 알프레드 마샬이라는 사람이 처음으로 한 도표에 수요곡선과 공급곡선을 동시에 그릴 생각을 했습니다. 알프레드 마샬이 그런 점에서 굉장히 중요한 업적을 남겼습니다 만은 아담스미스가 19세기 중반서부터, 알프레드 마샬이 19세기 중반에서 20세기 초반까지 활동을 했던 사람인데 아담스미스는 그것보다 100년전 사람이었습니다. 아담스미스가 고전경제학이라고 이야기를 하면은 우리는 알프레드 마샬은 신 고전경제학, 신 고전학파의 이제 태두다. 알프레드 마샬이 시작이다. 그래서 사실 요즘 경제학에서 가르치고 배우는 기본적인 모형들은 다 알프레드 마샬의 모형이라고 이렇게 이해를 하시면은 되겠습니다.

그런데 이 알프레드 마샬의 수요공급이론이 굉장히 탁월하지 않습니까? 가격이 떨어지면은 수요가 늘어나고 가격이 올라가면 수요가 떨어지고 공급은 그 반대고 우리가 굉장히 전세가 가격이 올라가면은 아무래도 주춤하지 않습니까? 가격이 올라가면은 매수세가 조금 주춤하지 않습니까? 그렇지 않습니까? 그래서 아주 기본적으로 우리 경제현상을 잘 설명해주는 모델이기는 한데 제가 문제 삼는 것은 이 수요공급이론이 이 기초하고 있는 전제들이라는 것입니다.

전제가 제일 중요한 전제는 사람은 합리적 판단을 하는 이성적 존재라는 전제입니다. 이것은 이성주의 그러니까 중세, 그 다음에 르네상스, 계몽주의 이렇게 오면서 이 이성주의가 아주 활발하게 발달할 때, 이성주의는 굉장히 중요한 것 입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사람의 이성을 통해서 자연의 비밀을 우리가 해석할 수 있고 자연을 활용할 수 있고 계산에 의해서 어떻게 보면은 뉴턴의 고전물리학이라는 것도 다 어떻게 보면 이 이성주의에 기반한 것이라고 이야기할 수 있습니다. 이성주의는 굉장히 중요한 역할을 많이 했습니다.

그런데 이 수요공급모델이 기초하고 있는 것은 첫째 인간은 합리적 판단을 하는 이성적 존재라는 전제가 있습니다. 그 다음에는 완전경제학이라는 것을 전제로 하고 시장에서는 시장 메커니즘에서 시장에서 거래에 관한 모든 정보는 모든 시장참여자들에게 똑같이 열려있다라는 전제가 또 있습니다.

매우 비현실적인 전제들이지 않습니까? 이론을 발전시키기 위해서 어느 정도의 단순함이 필요하기는 하지만 옛날에 이성적 존재라는 전제는 사실은 인간은 이성적이기도 하지만은 매우 감정적이고 또 영성적 존재라는 우리가 상식적으로 아는 거기에 잘 맞지가 않습니다. 그러니까 한계를 가져올 수밖에 없습니다. 제가 책에서 몇 군데서 여러 차례 이야기하고 있지만 아담스미스가 소위 보이지 않는 손, 시장기능에 의해서 각자가 자기가 하고 싶은 대로 자기이익을 추구하면 여기서 그런데 중요한 것은 아담스미스가 각자가 자기 이익을 추구 하다 보면 이 시장 메커니즘에서 자기 이익을 추구한다는 것은 selfish 하다는 뜻이 아닙니다. Self interest 자기에게 중요한 것을 추구한다는 뜻입니다. 그리고 invisible hand라는 것은 국부론에 단 한번밖에 안 나옵니다. 그런데 마치 아담스미스가 그렇게 이야기하지 않았냐 그러니까 모든 규제는 철폐하고 전부 민영화하면 잘되겠다 라고 주장을 한 것이 사실은 1968년도 사이언스지에 실린 the tragedy of the commons 공유지의 비극이라는 논문이었습니다. 1968년에 뒤에서 조금 있다가 말씀 드리겠습니다 만은 그러한 모든 규제는 없애고 모든 것을 민영화해야 제대로 돌아가겠다. 그런데 그 근거는 invisible hand. 아담스미스를 아주 곡해하는 것 입니다. 아담스미스는 그렇게 말한 적이 없습니다. 오히려 정부의 기능에 대해서 정부의 책임에 대해서 규제의 중요성에 대해서 여기저기서 굉장히 많이 주장을 했었습니다.

그래서 마샬 이후로 경제학이 쭉 발전해 온 것을 보면은 아주 일방적으로 수리모델, 계량모델에 적합한 것들만 취사선택해서 경제학을 발전시켜왔다. 저는 개인적으로 그렇게 봅니다. 만일에 신 고전학파 경제학이 맞는 것이라면 우리가 주식시장에서 주식가격을 우리가 예측하지 못할 이유가 없지 않겠습니까? 인간이 이성적인데, 이성적이면 우리가 예측할 수 있지 않겠습니까? 행동을 예측할 수 있지 않겠습니까? 할 수도 있지만 대부분 오히려 못하는 경우가 더 많지 않습니까?

주식 시장이 경제에선 가장 소음이 심한 시장이라고 말을 합니다. , 사람들의 정서, 사람들의 어떤 감정적인 것에 굉장히 영향을 받습니다. 중국 지금 상당히 상황이 좀 복잡하지 않습니까? 이게 거품이 낄 것 같다니까 정부가 조금 찬물을 끼얹었습니다. 그러면 이게 속도가 그냥 조금 제어될 줄 알았습니다. 아닙니다. 사람들이 패닉한 것 입니다. 그러니까 푹 떨어져버린 것입니다. 그러니까 중국정부가 몇 가지 부양책을 써도 듣질 않습니다. 왜냐면은 너무 끓어오르니까 조금 물 부으면은 조금 이렇게 진정은 되겠지 했는데 진정이 되는 게 아니라 팍 죽어버리는 것 입니다. 그래서 지금 중국 조금 그런 어려움을 겪고 있습니다.

그러니까 인간이라는 것은 이성적인 존재이기도 하지만 매우 감성적인 존재이고 근래에 우리는 인간은 또 영성적 존재라는 것에 대해서 좀 눈을 뜨게 됐습니다.

그래서 이러한 접근법을 저는 기계론적 이성주의라고 이름을 붙였습니다. 기계론적 이성주의적인 방법으로는 우리가 시장을 제대로 잘 이해할 수 없다. 그러면 어떤 대안이 있을까 라고 생각, 생태적 관점이 어떨까? 이런 생각을 하게 됐습니다.

생태계 하면 자연, 자연하면은 우리가 진화론 혹은 다윈선생 이런 생각을 우리는 하게 됩니다. 우리가 다윈선생한테 배운 진화론에서 중요한 원칙들이 몇 가지가 있지 않습니까? natural selection, 자연 선택이라는 것, 그렇지 않습니까? survival of the fittest, 적자생존. 환경에 가장 잘 적응하는 종이 개체가 아닙니다. 또 많은 사람들이 오해를 합니다. 환경에 가장 잘 적응하는 종이생존 한다는 것이 개체 하나하나가 생존한다는 이야기는 아닙니다. 인류라는 종이 과연 이러한 환경, 환경 위기를 우리 인류 스스로가 만들어냈는데 여기에서 우리가 살아남기 위해서 우리는 과연 무엇을 할 것인가? 그렇지 않습니까? 인류가 하나의 집단으로써 종을 이야기합니다. 그 다음에 돌연변이, 이런 것들을 우리가 배웠습니다. 굉장히 우리한테 중요한 것 이었습니다. 그런데 여기서 특히 적자생존과 관련해가지고 우리가 자연에 대해서 이런 이야기를 많이 듣지 않습니까? 생존경쟁, 자연을 봐라. 생존경쟁을 봐라. 적자생존 아니냐? 그런데 적지 않은 사람들이 적자생존을 강자생존으로 오해하고 있습니다. 강한 자만이 살아남는다. 승자독식, 이렇게 이야기를 합니다. 그래서 소셜 다위니스트들은 인간사회도 자연과 마찬가지로 자연과 마찬가지로 끊임없는 경쟁을 통해서만 강해지고 발전할 수 있다 라는 허황된 주장을 하는 것 입니다.

첫째, 자연은 그렇지 않습니다. 자연은 승자독식이 없습니다. 승자독식을 하게 되면 생태계가 망가져버리기 때문에 생태계는 절대로 특정 종의 독식을 허용하지 않습니다. 그랬다면은 이미 자연 생태계는 오래 전 10억년, 20억년 전에 이미 끝났을지도 모릅니다. 자연이 진화하고 지속 가능했던 가장 큰 원칙 중의 하나가 승자독식을 허용하지 않는 것입니다. 그래서 생태계에서 우리가 배울 수 있는 그리고 시스템이론을 생태계에 적용했을 때 우리가 배울 수 있는 게 두 가지라고 제가 책에서 이야기를 하고 있지 않습니까?

하나는 무엇 입니까? 적정규모, 하나가 너무 커지면 생태계에 위협이 된다. 둘째, 다양성입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적정규모가 지켜지고 다양성이 증가할 때 그 생태계는 건강해집니다. 종이 적어지면 적어질수록 생태계가 위험해지는 것입니다. 그런 관점에서 우리가 시장을 보는 관점을 조금 바꿀 수는 없을까? 이런 생각을 하게 됩니다.

이제 이 생존경쟁 이라는 것을 봤을 때 얼룩말이 얼마나 빨리 뛸 수 있습니까? 사자와 얼룩말이 누가 더 빠릅니까? 얼룩말은 대개 시속 60km, 사자는 시속 45km로 뜁니다. 사자가 사자는 가장 힘이 센 동물임으로 유명한데 사자는 얼마나 자주 사냥을 나갑니까? 매일 나갑니까? 대게 3일에 한번 정도 나갑니다. 3일에 한번, 3일에 한번 나가서 한번 나갔을 때 성공확률이 몇 퍼센트나 됩니까? 30%라고 합니다. 그럼 3일에 한번 나가는데 30% 확률이면 며칠에 한번 배불리 먹겠습니까? 9일에 한번, 그냥 쉽게 해서 열흘에 한번 배불리 먹는 것 입니다. 사자가 제명에 죽을 확률, 10에서 20%이유는 굶어 죽는 것 입니다. 사자가 갈기를 ? 날리면서 바위 위에서 딱 폼 잡고 있는 그런 장면들 그거 쉬운 일이 아닙니다. 그런데 어쩌다가 아사를 하게 되냐? 얼룩말이 사자보다 훨씬 더 빨리 뛰기 때문에 사자는 사냥을 할 때 초식동물을 사냥할 때 굉장히 낮은 포복으로 가까이 접근해서 한번에 덮칩니다. 왜냐하면은 사자는 전속력으로 질주를 하면 체온이 급상승을 해서 30분 이상 그 속도로 뛰게 되면은 심장이 파열이 된다고 합니다. 그러니까 오래 뛸 수 없는 것 입니다. 그래서 가까이 가서 덮치는 건데 늘 성공하는 게 아닙니다. 얼룩말의 가장 강한 부분이 뒷다리랍니다. 뒷다리로 차이면 턱을 차이면 턱뼈가 으스러지지 않겠습니까? 으스러지면 아주 단순합니다. 그냥 못 먹으니까 그냥 죽는 것 입니다.

생존경쟁 분명히 있습니다. 적자생존 분명히 있습니다. 그런데 무한경쟁, 승자독식은 아니라는 것 입니다. 제가 주장하는 것은 무한경쟁, 승자독식은 아니라는 것 입니다. 또 다른 현상을 보면은 케냐 북서부 고원지대에 아카시아나무들이 많이 잘 자라고 있었는데 이 아카시아나무들이 거의 다 죽어버렸습니다. 그런데 플로리다 대학 교수들이 위성사진을 분석하다가 어느 날 깜짝 놀란 것 입니다. 그 지역이 다 초록으로 변해버렸습니다. 이게 도대체 무슨 일이 생긴걸 까 가보니까 Drepanolobium 이라는 특별한 종의 아카시아 나무가 거기서 번성을 하고 있는 것 입니다. 코끼리의 아카시아나무의 이파리하고 연한 가지를 굉장히 좋아한다고 합니다. 그래서 다 따 먹은 것 입니다. 그러니까 다 죽어버린 것 입니다. 그래서 다 황폐화 돼버렸습니다, 그 지역이, 그런데 어느 날 가보니까 아주 울창한 것 입니다. 가서 보니까 이 라는 이 Drepanolobium 아카시아나무는 독특하게 생겼습니다. 보통 아카시아나무하고는 다릅니다. 끝이 뾰족하고 속에 구멍이 나있고 속에 Crematogaster 이라는 5mg정도 되는 작은 개미들이 그 속에 사는 것 입니다. 멋모르고 코끼리가 와가지고 야 따먹자 하고 딱 오면은 얘들이 전부 일제히 기어 나와 가지고 코끼리 코 속으로 기어들어가는 것 입니다. 자기 몸의 10억배 정도 됩니다. 개미하고 코끼리하고 자기 몸의 10억배정도 되는데 얘들이 기어들어가면은 방법이 없습니다. 이거 뭐 앞발로 빼내겠습니까, 뒷발로 빼내겠습니까? 미치는 것 입니다. 그걸 코끼리들이 배웠습니다. 배워가지고 얘들아 저기는 가지 말자. 그래서 그 부분의 식생이 아주 좋아진 것 입니다. 그래서 이 곤충하고 식물하고의 협조관계에 대해서는 제가 좀 찾아봤습니다. 논문들이 굉장히 많습니다. 이것들뿐만 아니라 그래서 동물하고 식물, 곤충과 식물, 서로 상호부조하는 서로 돕는 이런 관계들 역시 생태계의 지속성을 담보해주는 또 다른 메커니즘이다. , 경쟁과 협조는 같이한다. 이것은 지속가능의 양 축이다. 수단 방법을 가리지 않고 경쟁사를 죽이는 것만이 능사가 아니구나 이런걸 우리가 여기서 배울 수가 있습니다. 우리가 지속가능성에 관심이 있다면 그렇습니다.

아담스미스가 이렇게 아주 유명한 이야기가 있습니다. 그런데 이 국부론쓰기 17년 전에 아담스미스는 도덕감정론이라는 책을 썼습니다. 이것을 우리가 알 필요가 있습니다. 아담스미스가 국부론에서 시장의 기능, 자율적 기능 혹은 보이지 않는 손의 기능에 대해서 설명을 했다고 했을 때 시장 참여자로써의 인간은 어떻게 전제했느냐는 17년전에 쓴 책에 나와있습니다. 17년전에, 공감하는 존재, 사회적 존재, 그렇지 않습니까? 인간이 아무리 이기적인 존재라고 하더라도 천성에는 분명히 이와 상관하는 몇 가지 특성이 존재한다. 타인의 운명에 관심을 갖게 되는 것 입니다. 이타성을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공감능력을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그러니까 아담스미스는 경제참여자로써의 인간을 공감할 줄 아는 능력을 가진 존재로 이미 전제하고 국부론을 쓴 것 입니다. 이거를 우리가 좀 알 필요가 있습니다. 아담스미스가 그렇게 무모한 사람은 아니었습니다. 정말 훌륭한 사람이었습니다.

1968년에 개럿 하딘이 쓴 공유지의 비극 여기서 이야기하는 것은 그런 것 입니다. 목초지가 정해져 있는데 사람들이 서로를 소를 먹이게 되면은 사람들이 자꾸 자기 소 한 마리를 더 집어 넣으려고 할 것이다. 왜냐하면은 코스트는 n분의 1이니까, 그런데 소 한 마리 더 먹이면은 수입이 훨씬 많이 드니까 자꾸 그러다 보면은 동네사람들이 그러다 보면은 이 목초지는 결국 황폐화될 거다. 이게 공유지의 비극을 이야기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딘은 그야말로 민영화, 사유화를 주장했던 사람입니다. 1968년입니다.

그 이후에 얼마 안돼서 카턴 정부를 지나고 런 웨이건이 대통령이 된 게 1980년입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80년서부터 미국은 상당기간을 소위 작은 정부, 혹은 규제완화 민영화 사유화 이쪽으로 치닫습니다. 저는 개인적으로 이 개럿 하딘의 저작이 대단히 큰 영역을 미쳤다고 봅니다. 거기에 대한 폐해를 우리가 많이 보게 되고 됩니다. 이제 공유지의 비극이라는 건 아주 굉장히 거의 일상적인 용어가 돼버렸는데 엘리너 오스트롬이 여기에 대해서 1990년입니다. Governing the commons라는 책을 썼습니다. 이게 굉장히 중요한 책입니다. 제가 책에서도 설명을 하고 있지만 엘리너 오스트롬은 최초로 노벨 경제학상을 받은 여성 정치학잡니다. 이 사람이 굉장히 스터디를 많이 했습니다. 그래가지고 세계각지에서 그러니까 우리가 대게 규제 혹은 민영화 정부의 개입 규제 혹은 민영화, 사유화 이론적으로 되게 이분법적으로 많이 봐왔습니다. 그런데 어느 쪽도 해보니까 다 문제가 있고 다 단점이 있다. 당연한 합니다. 인간이 만든 제도인데, 어떻게 부작용이 없고 어떻게 문제가 없겠습니까? 그 높은 이상으로 시작했던 사회주의혁명 70년만에 망해버렸습니다. 현실사회주의는 실패했습니다. 참혹하게 안 되는 것 입니다. 그럼 그 이후에 나타난 신 자유주의는 우리 모두를 더 부유하고 행복하게 만들어주느냐? 아닙니다. 빈부격차는 어마어마하게 더 커지고 있습니다. 대기업 사장이 저런 말을 할까? 걱정이 돼서 그럽니다. 우리 시장 토대가 무너지고 있습니다. 우리 기업이 잘 되려면 회사가 잘 되려면은 시장이 튼튼해야 되지 않겠습니까? 그런데 시장의 한쪽 구석이 무너지고 있습니다. 왜 걱정이 안되겠습니까? 이런 빈부격차나 이런 우리사회 문제를 걱정하지 않는 경영자는 사실은 진정한 의미에서 경영자가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자기 회사가 존립할 수 있는 기본적인 토대 한쪽이 무너지고 있는데 왜 걱정을 안 하겠습니까? 그런데 엘리너 오스트롬은 꼭 양자택일을 그렇게 해야만 되는 것은 아니다 라는 것을 우리한테 보여준 사람입니다. social capital, 사회적 자본, 스스로가 커뮤니티 공동체 스스로가 스스로를 지배하는 것 입니다. 자기가 하는 것입니다.

 

[ 영상: 스위스 퇴르벨 마을의 공동 목초지 규약 ]

 

500년이 넘도록 규약을 그대로 이행고 있습니다. 500년 넘도록 꾸준히 생산성을 유지해오고 있습니다. 엘리너 오스트롬이 이렇게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단순히 공유자원이 보존되기만 했던 게 아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일을 계속하고 기여를 함으로써 이게 된 것이라는 것 입니다.

여기서 포인트는 저는 규칙을 세우고 지키는 것이라는 것 입니다. 어떠한 공동체도 규약, 규칙을 지키고 만들고 그거를 지키지 않으면 절대로 공동체가 유지될 수 없다는 것입니다. 맘대로 하고 싶은 대로 해가지고 유지될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습니다. 그래서 우리가 이쪽이냐, 저쪽이냐, 좌냐, 우냐, 보수냐, 진보냐, 이런 이분법적인 우리의 접근을 굉장히 이제는 신물이 나지 않습니까? 결국 사람들에게 도움이 되고 우리 사회를 더 좋은 사회로 만드는 것이 좋은 것이고 그렇지 않은 것은 버려야 되는 것입니다. 그 두 가지 말고 다른 대안이 없을까? 이런 것들을 모색하는 분들은 많이 있지 않습니까, 정치 쪽에서도, 경제에서도 마찬가지로 사유재산제냐 아니면은 정부규제냐 이 그렇게 꼭 두 가지 양단간의 흑백으로만 보지말자 라는 모델을 제시한 것이 엘리너 오스트롬 입니다.

우리가 관심을 갖고 지켜볼 그러한 현상들이라고 생각을 하고 우리에게 많은 영향을 준다고 봅니다. 사실은 이러한 원칙들이 새로운 기업 생태계로써의 실리콘 밸리에서 요즘 진행되고 있는 일어나고 있는 일들이 어쩌면은 이거랑 비슷한 거 아닐까? 그런 느낌도 저는 조금 받습니다. 한국의 경우 입니다.

 

[ 영상: 제주도 해녀공동체 규약 ]

 

이런 사회적 자본에 관해서 공동체에 대해서 규약에 대해서 공유지의 비극을 뛰어넘는 이러한 케이스를 통해서 우리가 어떤 새로운 대안들을 모색할 수 있다. 이렇게 생각을 합니다.

작년에도 제레미 리프킨이 한국에 와서 이런 이야기를 합니다. 새로운 경제체제의 도래를 우리가 지금 높여 가고 있다 자본주의가 사라질 것이라고 믿는 것은 아니다. 우리는 지금 새로운 형태의 경제체제를 목표로 하고 있다. 변화의 목표지점은 공유경제와 협력적 공유사회라고 예상한다. 아이고 참 꿈꾸고 있네 이런 반응이 있을 수도 있습니다. 두고 봐야 되겠지만 적어도 우리가 희망의 근거를 어디서인가 찾고자 하는 그러한 노력의 우리가 포기하지 않는다면 이러한 케이스들이 여기저기서 보이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이게 아까 말씀 드린 supply & demand 입니다. supply & demand 를 생각할 때 집게 손 생각이 났습니다. 가위 손, 집게 손. 그렇지 않습니까? 좀 차갑지 않습니까? 거기에 비해서 천수관음보살을 하면은 너무너무 따뜻합니다. 세상의 싫은 소리를 들어주는 보살, 따스함, 품어줌, 위로의 상징입니다. 프랑스의 기메 박물관 파리의 기메 박물관에 있습니다. 제가 가서 찍었습니다. 제가 1 2쇄에는 못 실었습니다. 3쇄에는 제가 찍은 사진으로 실었습니다. 너무나 이미지가 좋습니다. 그리고 기메 박물관을 가보니까 천수관음보살 이것은 티벳 불교, 밀교의 영향으로 고려시대 때 주조된 것 입니다. 여러 아시아 나라들의 전통적인 천수관음보살상들이 굉장히 많습니다. 수십 개 됩니다. 그런데 이렇게 아름답고 이렇게 조화로운 천수관음상이 다른 나라에는 없습니다. 그래서 시장은 이 공감능력을 가진 사람들이 지혜로운 공감 자들이 창조해내는 축제의 장이다라고 제가 주장을 하고 있는데 거기서 저는 천수관음보살상의 이미지를 제가 생각을 해본 것 입니다.

시장은 비장한 것이다. 승자독식이다. 반드시 그렇게만 생각할 이유는 없지 않을까 시장을 통해서 우리가 보다 풍성해지고 보다 행복해지고 더불어 같이 살 수 있는 근거를 만들어 낼 수 있는 장을 시장이 아닐까? 이렇게 저는 생각을 합니다.

아까 시장 말씀드릴 때 수요공급곡선을 어떤 기계론적 이성주의의 대표적인 이미지로 수요공급모델을 보여드렸습니다. 기업하면은 회사, 조직하면은 또 대표적으로 생각하는 게 부품으로 이루어진 기계 시스템으로 보는 것 입니다. 영어로는 이것을 TO라고 그럽니다. TO가 있어야 사람을 뽑지, 그렇지 않습니까? TO가 무엇의 약자냐, table of organization입니다. 빈 박스가 없다는 것 입니다. 박스가 있어야 사람을 채워 넣는 것입니다. 박스가 없다는 것 입니다.

아무튼 그래서 기계론적 이성주의라고 제가 이야기 드리는 게 그러니까 고전물리학에서, 고전물리학에서는 이 천체, 전체를 거대한 기계시스템으로 봤습니다. 부속으로 이루어진, 그래서 부속이 하나 망가지면은 갈아 끼면 되는 것입니다. 조직에서 사람 잘라, 다른 놈 갖다 넣어, 이런 멘탈리티, 이게 기계론적 이상주의, 그냥 바로 대체가 가능하다고 보는 것입니다. 물론 일의 종류에 따라서 단순 반복적이고 본인의 창의와 자신의 자발성이 별로 그렇게 요구되지 않는 작업은 그럴 수도 있지 않겠냐? 정도 차이는 있겠지만 말입니다. 그러나 어떠한 일이라도, 어떠한 노동이라도 사실 자발성이 전제되지 않으면은 그 일의 퀄리티를 보장할 수 없습니다. 단순히 감독하고, 혹은 계산하고 모니터링 한 것만으로 우리가 과연 우리에게 필요로 한 생산성을 확보할 수 있는 시대일까요? 아니라고 보는 것입니다. 20년전, 30년전에는 가능했을 수도 있다. 그러나 이제는 시대 자체가 달라져서 요즘 보십시오. 가장 세계적으로 가장 주목 받고 가장 잘나가는 기업들을 보면 구글이라든가 애플이라든가 그렇지 않습니까? 그런 회사들 좀 보시기 바랍니다. 단순방법으로 바꿔 치기 하고, 바꿔 치기 해가지고 되는 그러한 조직이겠습니까?

그래서 요즘 모든 대부분의 정교한 조립과정은 전부 로봇이 하고 있습니다. 로봇하고 사람하고 가장 큰 차이점은 역시 자발성일 것입니다. 로봇은 시키는 대로, 프로그램 된 대로 무지하게 잘합니다. 효율성이 엄청 높습니다. 휴먼에러라는 것을 우리가 극복하기 위해서 로봇을 쓰지 않습니까? 써야 됩니다, 당연히 써야 됩니다. 그러나 로봇을 누가 조종합니까? 그 프로그래밍은 누가 합니까? 사람이 한다는 말입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기업을 부품으로 이루어진 기계시스템으로 보지 않고 다르게 이렇게 볼 순 없을까, 기업을 생명체로 보자. 기업이 무얼 하냐, 회사가 무얼 하냐, 비즈니스를 한다. 그런데 비즈니스라는 말은 말 자체, 단어자체는 별 재미가 없는 단어입니다. 바쁘다는 거 외에는 다른 거 생각할 수가 없습니다. 바쁘긴 바쁩니다. 비즈니스 하는 사람들 그렇지 않습니까? 비즈니스 하면 재미가 없습니다. 우리 every day 용어 비즈니스라고 씁니다.

그런데 똑같은 비즈니스를 의미하는 게 스웨덴에 가보니까 이런 의미를 갖고 있습니다. Nourishment for life입니다. 생명체에게 주는 자양분이라는 의미 입니다. 생명체에게 주는 자양분 그러니까 사업을 한다는 것은 본질적으로 생명체에게 자양분을 주는 것이다 라는 의미를 내포하고 있습니다. 것은 상대 경쟁사를 죽이는 것이 아니고 생명체에게 자양분을 주는 행위다. 그 과정에서 경쟁을 피할 수가 없고 경쟁에선 이겨야 하고 경쟁에서는 패자도 나오고 그거는 경쟁의 룰에 적응하지 못했거나 환경에 적응하지 못해서 지는 거니까 그것은 생태계적 관점에서 보면 어쩔 수 없는 것이다. 생명체에게 주는 자양분이다.

동양적으로 보면 중국에서 3000년 전부터 써오던 용어란 말입니다. 生意. 일상적으로 씁니다. 의미가 무엇입니까? 생의, 살리고자 하는 뜻 아닙니까, 대단하지 않습니까? 중국에서 어쩌면 사업한다는 의미로 쓰는 의미가 둘 다 생명과 관계가 있을까? 그래서 사업한다는 것은 살린다는 것입니다.

사업한다는 것을 뭔가 살리는 것입니다. 살림살이 하는 것입니다. 사업한다는 것은 죽이는 게 아닙니다. 살림살이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기업을 회사를 생명체로 본다면 과연 어떻게 되는 걸까? 살아있는 것입니다.

기업은 시장이라는 생태계 속에서 살아나는 생명체다 이렇게 보면은 모든 생명체가 가지고 있는 가장 강한 본능이 무엇입니까? 그렇습니다. 생존본능입니다, 생존본능. 생존본능이 없으면 생명체가 아닙니다. 이미 죽은 것입니다. 메르스, 참 그렇지 않습니까? 그 면역체계가 당하지를 못하는 것 아닙니까? 그렇지 않습니까? 살아남고자 하지 않는다면은 면역체계가 작동하지 않는다는 것은 이미 죽은 것입니다. 바이러스나 세균이 세계에서 무게로 따지면은 모든 종 중에서 가장 무겁다는 거 아니겠습니까? 그걸 다 합치면, 그래서 무서운 것 아닙니까? 우리 몸에 면역체계가 작동하지 않으면은 우리가 몇 분 안에 죽을 것입니다. 우리 면역체계가 우릴 지켜주고 있지 않습니까?

또 하나 그 다음에 무엇입니까? 번식본능입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자기복제, 자기 복제를 하고 싶은 거 그러면서 이 종이 우리가 진화되고 생태계 속에서 자기 자리를 잡는 것입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그러니까 생물체로써 기업은 영속적으로 생존하고 번성하고자 하는 열망을 가지고 있다라고 전제할 수 있겠습니다.

우리는 한탕 벌고 튀는 먹튀 이야기를 하는 게 아닙니다. 기업을 이야기하는 것입니다. 영어로 뭐라고 그럽니까? going concern이라고 합니다, 지속성을 이미 전제하고 있습니다. 기업이다 했을 때는 지속성을 전제하고 들어가는 것입니다.

기업이 이윤극대화를 위해서 존재하는 거 아닙니까? 이렇게 이야기를 할 수가 있습니다. 제가 실제로 가끔 대학에 특강을 가서 일부러 학생들한테 물어봅니다. 기업의 존재이유가 무엇입니까? 존재목적이 무엇입니까? 이러면 다같이 이윤극대화입니다. 이렇게 대답합니다. 아주 잘못 가르치고, 아주 잘못 배운 것입니다. 이윤극대화는 기업의 단기적인 경영목표는 될 수 있습니다. 그래야 합니다. 그러나 존재목적은 아닙니다. 존재목적은 아니라는 것입니다. 그럼 헷갈리기 시작합니다. 그래, 그럼 사장님 이윤이 중요하지 않다는 이야기 입니까? 내가 언제 이윤이 중요하지 않다고 그랬습니까? 이윤은 정말 중요한 것입니다. 이윤 안내면 우린 죽습니다. 3년 적자 내봐 죽습니다. 그러니까 죽기살기로 이익을 내야 된다. 그런데 그게 지속가능성을 담보해주지는 않는다. 여기서 걸리는 것입니다. 그 생각을 못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이윤극대화는 지속가능성을 극대화하는 필요조건입니다. 그거 없으면 다 죽습니다. 그러나 충분조건은 아닙니다. 충분조건은 뭐냐? 기업의 지속가능성을 위한 충분조건은 뭐냐, 가치 극대화라는 것입니다. 모든 이해 관계자들 우리가 사업을 해나가는데 있어서 우리가 함께 협력 사들 납품업체 등 모두 우리와 함께 협조하는 모든 이해 관계자들이 일의 이해 관계자라고 할 수 있겠습니다. 모든 이해 관계자들 그 중에서도 가장 중요한 고객, 그 다음에 우리 조직구성원들, 주주들, 공급업체들, 모든 이해 관계자들에게 뭔가 유익함을 우리가 줘야 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사업을 함으로써 기업을 영위함으로써 그 결과로써 그 과정에서 그 결과로써 모든 이해 관계자들에게 유익함이 가야 되는 것입니다. 그게 바로 가치 극대화라는 것입니다.

이것이 기업의 존재목적이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윤극대화, 가치극대화, 필요조건, 충분조건 어디까지나 이것은 지속가능성을 염두에 해둔 것입니다. 나는 지속가능성에 관심 없어 그러면 다 잊어버리시길 바랍니다. 이거 아무 소용도 없습니다. 골치만 아픕니다. 그러나 지속하겠다면 생존과 생존과 번성에 대한 열망을 가지고 우리 회사는 적어도 100년은 가야 됩니다. 적어도 300년은 가야 되겠다. 이렇게 한다면은 이거 안하고는 안됩니다. 방법이 없습니다.

기업의 존재 목적에 대해서 Merck 1950년에 버지니아대학, 의과대학에서 행한 당시의 Merck 회장의 연설만큼 명확하게 이야기한 것도 없는 것 같습니다. 이쯤에서 우리 선생님 한번 읽어주시기 바랍니다.

나는 우리회사가 분투하며 견지해온 원칙을 한마디로 종합하고자 한다. , 의약품은 환자를 위해서 존재하는 것이지 이윤을 위해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이 사실을 제대로 기억했을 때는 늘 이윤이 따라왔다. 그리고 더 잘 기억할수록 이윤은 더 커졌다.

21세기 이야기가 아닙니다, 1950년에 한 연설입니다. Merck 347년 된 회삽니다. 347, 깊이 들어가면은 조금 복잡해지는데 미국 Merck가 있고 독일 Merck가 있습니다. 그건 어쩔 수 없이 1차대전 이후에 이렇게 분리될 수밖에 없었는데 미국 Merck가 한 46조 독일 Merck 14조 그 정도 되는 회삽니다. 그런데 별도의 회사이지만 양 회사는 똑같은 공유가치를 가지고 있습니다. 문화도 똑같습니다. 기업문화도, 올해 347년 됐습니다. 여전히 Merck 패밀리가 유지되고 있는데 Merck 패밀리가 지주회사를 지배주주로써의 역할을 해오고 있습니다.

스웨덴의 발렌베리 가문이야기 여러분 가끔 들으시지 않습니까? 들어보셨습니까? 스웨덴의 발렌베리 가문, 거기도 아주 오랜 기간 동안 발렌베리 페밀리가 지주회사를 통해서 컨트롤 하고 있는 거대한 기업집단입니다. 다 그렇게 할 수 있는 이 사회적 합의가 되어 있는 데입니다, 발렌베리 같은 경우는 말입니다, 지주회사, 즉 발렌베리 페밀리가 컨트롤 하는 지주회사로 들어가는 순이익의 85%를 세금으로 내기로 정부와 협약을 했습니다. 그러니까 스웨덴의 GDP 4-50% 차지할 것입니다. 발렌베리, 여하에 일렉트로 룩스도 있고 우리가 아는 엄청 유명한 회사들 많습니다. 그런데 거기서 이제 지주회사로 들어오는 순이익, 그 지주회사의 그렇게 해서 들어오는 순이익의 85%를 세금으로 내기로 협약이 돼있습니다. 그리고 정부가 경영권을 인정을 해주는 것입니다. 스웨덴 국민은 해피 합니다. 발렌베리가 잘 되면 스웨덴이 좋은 것입니다. 85%가 세금으로 오기 때문입니다.

두 번째, 발렌베리 가문의 개개인들이 절대 주식부자가 될 수 없게 되어 있습니다. 모든 이익은 법인으로 들어가게 되어 있습니다. 제가 알기로 발렌베리 가문의 패밀리 멤버들 중에 최대 자산가가 우리 돈으로 200, 그 정도 밖에 없습니다. 개인재산은, 100억 수준입니다. 조 단위가 아닙니다. 법인이 잘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스웨덴 같은 회사에서는 발렌베리 가문이 계속 경영권을 행사하는데 너무나 좋은 것입니다. 그리고 그 후계자 육성프로그램이라는 게 엄격하기 이룰 데 없습니다. 좋습니다.

재작년에 한국을 방문했던 프랭크 스탄겐베르그 하버캄라는 사람은 독일 Merck 지주회사 의장입니다. 어떻게 347년 동안 Merck 패밀리가 이렇게 해올 수가 있습니까? 거기에 대한 답은 돈이 아닌 가치를 물려주는 것이야 말로 다음 세대에 물려주는 것이 가장 큰 재산이다. 가치, 공유가치를 이야기하는 것입니다. 공유가치, 생각, 무엇이 중요한 것인가? 우리가 왜 존재하는가? 그렇지 않습니까? 1950년에 한 이야기 입니다. 우리가 왜 사업합니까? 돈 벌려고? 아닙니다. 환자 고치려고, 거기에 집중하고 잊어버리니까 돈이 저절로 벌리더라는 이야기입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쫓아가면 없어지는 것 이윤의 역설 입니다.  

또 다른 예로써 미국 최대의 유기농 Grocery chain 1980년에 창업하고 현재 홀푸드마켓을 운영하고 있는 존 맥키라는 사람이 있습니다. 재작년에 Conscious Capitalism라는 책을 Harvard Business School Press에서 냈습니다. 존 매키가 창업하고 현재까지도 경영의 지금은 CEO는 자기가 물려줬습니다. 지금은 Co-CEO를 하고 있습니다. 싶은 100대 기업 계속 들어가고 있습니다. 이 불경기 불황기 할 것 없이 지속적으로 성장하고 있습니다. 이 존 매키 CNN에서 인터뷰한 영상을 잠깐 보시겠습니다.

혹시 여러분 미국 가시면은 그 도시에 홀푸드마켓이 꼭 있습니다. 한번 꼭 가보시길 바랍니다. 들어가시면 굉장히 기분이 좋아집니다. 아주 기분이 상쾌해집니다. 아주 종업원 분들도 다들 전문가 같고 아주 참 기분이 좋아지는 느낌을 갖게 됩니다. 홀푸드마켓 같은 회사가 소위 사회적 책임 CSR한다고 무슨 특별한 활동을 하는가 돈을 기부를 하는가 그런 건 별로 없습니다.

저는 CSR에 대해서 이렇게 생각합니다. 기업의 사회적 책임이라는 것, 기업의 존재 목적에 부합되게 제대로 기업운영을 하는 거 자체가 CSR이라는 것입니다. 그냥 기업은 사회적 존재 아닙니까? 그렇지 않습니까? 기업은 사회적 존재 아닙니까? 사회적 존재로써 기업이 자기 할 바를 다 하는 거 그것이야말로 가장 근원적인 Corporate Social Responsibility입니다. 경영에서는 불법, 탈법, 편법을 해놓고 500, 5000억 돈 내놓으면 그게 CSR입니까?

그래서 CSR에 관련돼서 실제로 실무 한 사람들이나 혹은 교수들이나 학자들에게 저는 이 포인트를 늘상 이야기합니다. 과연 당신들이 기업에게 무엇을 요구할 것인가? 기업의 존재목적에 맞게 경영하는 것을 요구해라, 그것을 감시해라, 그것을 비판해라, 그것을 잘하면은 칭찬해줘라, 왜냐 그것이 CSR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제가 책에 제일 앞부분에 그림 생각나십니까? EGO CEO 만물의 영작, 내가 왕이야, 내가 제일 위야, 까불지마, 시키는 대로 해, 그게 아니고 ECO CEO입니다. 이 전체 생태계 서로 연결되어있는 전체생태계 속에서의 나의 자리를 확인하고 그렇지 않습니까? 거기에서 이 전체의 내가 무엇을 함으로써 전체에게 영향이 가는지 나는 또 전체에게서 어떤 영향을 받는지 그래서 이콜CEO, 이고O 앞으로 우리에게 필요한 CEO는 이콜CEO라고 저는 생각을 합니다. 그런 사람들이 정말로 소중해지고 중요해지는 그런 시대인 것 같습니다. 나를 따르라, 나만 믿고 독불장군, 시키는 대로, 까라면 까, 이런 CEO들은 아마 별로 부르는 찬스가 많지 않을 것 같습니다. 

인간이야기로 넘어가겠습니다. 찰리 채플린 모던타임, 1936년 무성영화입니다. 맨날 죄다 완전히 모든지 보면 조이려고 그러지 않습니까? 그래서 정신병원에 실려가고 그런 스토리입니다. 삶과 노동, 제가 1980년에 미국 유학 가서 첫 학기에 받은 reading assignment 중에 하나가 두꺼운 GM 노동자 이야기입니다. 자기는 출근할 때 그 출근 철커덕 하고 타임클락 있지 않습니까? 종이 넣으면 척 그렇게 되지 않습니까? 딱 그거 할 때 자기 영혼을 거기다가 맡겨놓는다고 합니다. 그걸 하루 종일 일하고 집에 돌아갈 때 다시 철커덕 해 가지고 영혼을 다시 돌려받아서 집에 간다고 합니다. 그런 표현이 있는데 잊혀지지가 않습니다. 정신병이 안될 수가 없습니다.

그런 삶이라는 것은 결국 1920년대, 30년대 그때 이제 fordism이라고 우리가 이야기하는 대량생산 테일러 식의 대량생산방식의 컨베이어벨트 시스템을 도입한 게 fordism이지 않습니까, 엄청난 생산성의 향상을 가져왔습니다. 엄청난 생산성, 자동차를 사람이 살 수 있게 됩니다. 그런 결과를 가져온 반면, 그 속에서 소위 노동소외라는 것이 또 시작되게 되는 것입니다.

다 양면성이 있는 것입니다. 노동하는 인간의 두 가지 측면, 회사에서 일하는 그렇지 않습니까? 노동하는 모든 사람의 두 가지 측면, 휴먼 resource측면이 있고 휴면 source측면이 있는 것입니다. resource 측면이 있습니다. 회사는 사람이 필요하니까 뽑지 않습니까? 회사 사람 왜 뽑냐? 일 시키려고 뽑는 것입니다. 부가가치 창출에 기여하라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resource입니다. 땅 사는 거나, 건물 사는 거나, 기계사는 거나 소프트웨어 사는 거나, 시스템 사는 거나, 다를 게 없습니다. resource입니다. 생산과정의 요소입니다.

그러나 동시에 휴면은 source입니다. 모든 해결은 결국 사람머리에서 나오는 것입니다. 로봇이 작동하는 모든 시스템, 소프트웨어 다 사람이 만드는 것입니다. 단순화 되면 물론 소프트웨어가 소프트웨어를 만들기도 하지만은 본질적으로 사람이 하는 것입니다.

휴먼은 source입니다. source입니다. resource가 아닙니다. resource의 본질은 무엇입니까? 쓰고 버리는 것입니다. 쓰고 버리는 게 resource아닙니까, 자원, 그렇지 않습니까? 사람을 쓰고 버린다? 그거 조금 문제가 있다? 왜냐 사람은 resource이기도 하고 우리가 회사 관점에서 보면은 source이기도 하기 때문입니다. doing측면과 being 측면의 차이 입니다. 뭔가 우리가 능력을 발휘해서 일을 해내는 게 doing입니다. 성과를 내는 것, 그러나 그런 성과와 무관하게 한 인간으로써, 한 존재로써 존엄성을 가진 존재로써 나는 그 누구보다 높지도 않고 낮지도 않습니다. 똑같습니다. 기독교적으로 이야기하면은 하나님이 창조한 모든 인간은 다 똑같다. 평등하다. 이런 식의 표현이 있습니다. 불교적으로 표현하면은 개 유불성 입니다. 모든 존재는 불성을 갖고 있다. 그런 거에선 차이가 없다. 어떻게 보면은 불교가 기독교보다 한발 더 나갔습니다. 기독교는 모든 사람이 똑같다고 하는데 개 유불성은 불교는 모든 존재는, 모든 유정 물은 불성이 있다고 그랬습니다. 어떻게 보면은 좀 더 스케일이 큽니다.

어쨌든 being 측면에서는 차이가, 높낮이가 있을 수가 없습니다. 한 존재, 인간 존재라는 점에서 이것이 파괴되는 현상이 나타날 때 사회는 불안정해지는 것입니다. 더불어 살기가 힘든 것이 됩니다. doing측면은 별 문제 없습니다. 우리 이런 것 잘합니다. doing쪽은 열심히 하고 또 문제는 being측면의 지금 상당한 위협을 받고 있다고 볼 수 있습니다. 생산과정이 없어지면 생산과정의 설계자라는 것이지 않습니까? 관리의 대상 노동은 노동하는 인간은 관리의 대상 우리 다들 게으른 데가 있습니다. 편한 거 좋아합니다. 편한 거 싫어하는 사람이 어디 있습니까? 그래서 노동하는 인간은 한편으로 관리대상이지만 한편으로는 경영의 주체입니다. 조직구성원 모두가 자발적으로 참여적으로 일하지 않으면 회사가 미래가 없습니다.

그래서 우리가 제가 경영은 결국 사람이다 책에서 이야기하고 있지만은 우리가 인간 존중경영을 이야기한다는 말입니다.

그런데 왜 인간 존중 경영이 중요할까? 다른 건 중요하지 않다는 게 아닙니다. 다른 것 굉장히 중요합니다. 생산성 중요하고 성과주의 중요하고 그리고 다 중요합니다. 그런데 그 이야기까지 제가 다 할 수는 없으니까 일단 그거는 남겨놓고 떼어놓고 그런데 인간존중경영이 왜 중요하지 이거 이야기만 좀 드리려고 하는 것입니다.

우리의 관심은 지속적인 성과창출이지 않습니까? 회사에서 이게 우리 관심사 아닙니까? 하나 반짝하고 죽 쑤고 그런 거 말고 지속적으로 지속적으로 우리가 성과창출을 하고 싶은 게 우리 회사의 관심이란 말입니다. 그런데 이게 어디서부터 나올까 다른 요소들이 많이 있습니다. 좀 아까 이야기했지만 결국 생산성에 영향을 미치는 테크놀로지도 있고 뭐 여러 가지 요인들이 많다 이것입니다. 일단 다른 요소들은 다 똑같다고 보고 사람이 할 수 있는 게 뭔가 생각을 해보면 그러면은 지속적인 성과창출은 창의성에서부터 나온다. 개개인의 창의성, 그런데 조직 안에서 제가 회사를 21 LG를 다니지만 말입니다. 회사 안에서 어떠한 경우에 개인들이 창의성을 발휘할까 많이 관찰해보니까 주인정신이 있을 때 입니다. 이거 내 회사야, 이거 내 일이야, 이건 나의 운명이야, 이건 내 인생이야 누가 뭐라 그래도 라는 식의 주인정신이 있으면 온갖 것들이 다 나옵니다. 자기가 주인일 때와 주인이 아닐 때와는 너무나 다릅니다. 그래서 주인이 아니지만 주인정신을 갖는 사람들 이런 사람들이 결국은 창의성을 발휘하는데 주인정신을 가져라 하면 가집니까? 아닙니다. 주인정신 어디서 나오냐, 자기 존재감을 느낄 때 조직구성원들이 회사 여러분들의 부하들이 자기 존재감을 느낄 때 어, 나 중요한 사람이네? 이 회사에서, 있으나 마나 한 사람이 아니네, 내 보스가 나를 챙기네, 나한테 관심이 있네, 결국 이 자기 존재감이라는 것은 배려에서부터 옵니다.

배려, 여러분들 오해 없으시길 바랍니다. 무조건 잘해주고 등 두들겨주는 것이 배려 아닙니다. 못해도 계속 잘한다고 그러고 그거 배려 아닙니다. 진정한 배려는 배려 받는 사람이 성장 감을 느낄 때 그 때 그게 진짜 배려입니다. 예를 들면 보스 제 직원에게 물어 보십시오. 당신 보스 어떠냐고 아마 독하다고 그럴 것입니다. 이가 갈린다고 그럴 것입니다. 그런데 그렇긴 한데 제가 실력은 좀 느는 것 같습니다. 이렇게 말해주길 바랍니다. 저는 기대합니다. 예를 들면 그렇다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우리 보스 우리 사장 진짜 학을 뗀다 라고 하면서도 그런데 그 사람 밑에서 일 하면은 확실히 실력이 는다. 사람이 크다. 그래서 자기가 성장하기를 내 보스가 회사간에 조직이 내가 성장하는데 관심이 있구나 라는 것이 진짜 배려입니다. 보너스 주고 승진 빨리 시켜주고는 그 때뿐입니다. 오래 안 갑니다. 3개월도 안 갑니다. 그게 아니고 우리 보스는 내가 정말 성장하기를 원하는구나, 저 사람은 나를 속속들이 다 안다. 내 장점 단점 다 안다. 그러면서 내가 성장하기를 기대하면서 나에게 기회를 주는구나. 어떤 때는 종아리도 때리고 어떤 때는 후크도 들어오는데 그게 다 나를 키우기 위해서 하는 거야 라고 하면은 상처는 안 받습니다. 절대로 상처 안 받습니다. 이거 제가 머리에서 만들어 낸 것이 아니라 21년동안 회사 생활을 통해서 제가 터득한 원리중의 하나 입니다.

그래서 인간존중경영은 도덕적 당위가 아니라 실사구시적 현실원리입니다. 인간이니까 존중해야지. 아닙니다. 거기에 관심 없습니다. 뭘 그려야겠습니까? 그건 제 영역이 아니고 제가 인간 존중 경영이 중요하다고 하는 것은 실사구시적인 원리입니다. 이것이 인간존중입니다. 무조건 잘해주는 것? 인간 존중 아닙니다. 그것은 인간기만입니다. 무조건 잘해주는 것은 인간기만 입니다. 인간 존중은 사람 안 내보내는 것? 그건 인간 존중 아닙니다. 3년 계속 C이하로 받으면 내보내야 됩니다. 너도 먹고 살 길 찾아야지 이 회사에서 네 미래가 있는가? 우리 안 맞는다. 헤어지자. 다른 길 찾자. 내가 도와주겠다. 이게 인간 존중 경영입니다.

그래서 인간존중경영은은 한 마디로 무엇입니까? 라고 물어본다면 모든 조직 구성원들이 자기가 가진 잠재력을 최대한 발휘할 수 있도록 조직을 운영하는 것, 이게 인간존중경영 입니다. 모든 조직구성원들이 각자가 가진 잠재력을 최대한 발휘할 수 있도록 조직을 운영하는 것, 어떤 사람은 잠재력이 이렇게 큽니다. 어떤 사람은 그거밖에 안됩니다. 그러면 이 사람은 이 사람대로, 요 사람은 요 사람대로 자기 잠재력이 최대한 발휘, 그러니까 이 사람은 승진도 빠르고 성과급도 많이 받을 것입니다. 이 사람은 좀 느릴 것입니다. 그러나 그걸 같이 갈 수 있도록 경영하는 것, 그리고 안 되면 다른 길 찾도록 도와주는 것 이게 인간존중경영 입니다.

그래서 한 말씀만 더 드린다면 인간존중경영을 위해서는 성과주의 경영이 굉장히 중요합니다. 잘하든 못하든 전부 A주고 모두 똑 같이 성과급 주고 모두 보너스 주고, 이거 성과주의 아닙니다. 잘하는 사람, 능력과 성과가 탁월한 사람에게 더 많은 혜택을 주는 게 성과주의입니다. 왜냐하면 경제학적으로 보면 효율성 확보 때문에 그렇습니다. 그러니까 경제학에서 자원의 효율적 배분과 투입이라는 것이 있습니다. 자원의 효율적 투입과 배분, 어디에 어떤 자원을 얼마만큼 넣을 것인 것? 거기에서 소위 마지막 리턴이 한계수익이 최대한 될 수 있게 자원을 배분해야 된다. 이런 원리가 있습니다. 그렇습니까? 사람도 똑 같다는 것입니다. 인간의 능력도, 잘하는 사람은 더 큰 일, 더 많은 책임을 맡을 수 있도록 인사를 하는 것, 그게 성과주의 입니다. 그런데 효율성을 확보하기 위해서 하는 것입니다. 효율성을 확보하지 않으면 아무것도 할 수 없습니다. 기업을 존속할 수가 없습니다. 효율성이 가장 기본적인 원리입니다. Out-put, In-put 대비 그게 효율성 아닙니까? 효율성 확보를 못하면 우리는 아무것도 할 수 없습니다. 가장 기본입니다. 아까 제가 말씀 드렸습니다. 이윤 극대화는 필요조건이고 가치 극대화가 충분조건이라고 그랬습니다. 효율성, efficiency 이것이 필요조건입니다. 충분조건은 효과 성입니다. 그것이 효과 성입니다.

음양과 paradox, 책에서 제가 paradox 이야기를 많이 하고 있습니다. 음이고 양입니다. 한편으로 보면 노동하는 인간은 생산과정의 요소입니다. 생산과정의 요소로 봤을 때는 잘하는 사람한테 더 잘해주는 것 이게 공평성입니다. 그런데 존재 그 차제로서의 인간, 비잉(being) 측면에서의 인간은 평등성의 원리가 적용되어야 됩니다. 누구나 똑같이, 구내식당에서 밥 먹는데 사장이나 사원이나 다를 이유가 뭐가 있습니까? 똑같습니다. 평등성, 그건 존재론적 차원의 이슈입니다.

그래서 음양하고 태극의 원리에서 가장 제가 주목하는 것은 음과 양은 구분되어 있지만 분리되어 있지 않다는 것입니다. 음과 양은 구분되어 있습니다. 다릅니다. 그런데 분리되어 있지는 않습니다. 여러분 만약에 이게 똑 떨어져있다고 생각해보십시오. 이게 이렇게, 분리되어 있다고 생각해보십시오. 양 없이 음이 음일 수 있습니까? 아닙니다. 음 없이 양이 양일 수 있습니까? 아닙니다. 음과 양은 같이 가는 것입니다. 다르지만 늘 같이 가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 서양사람들은 파라독시컬한 여기에 우리 동양사람들만큼 편치가 않은 것 같습니다. 우리는 뭔지 모르겠는데 그거 말 되는데? 우리는 우리 문화적 DNA속에 음양이론, 음양적 사고가 우리 DNA속에 문화적 DNA속에 들어있습니다. 그러니까 21세기에는 우리가 훨씬 유리하다고 저는 생각합니다. 왜냐 하면 21세기는 Contradiction(모순)의 시대가 아니라 패러독스의 시대입니다.

 마지막으로 제가 리더십이야기를 한 마디만 하면 리더십에 대해서 수천 수 만권의 책이 있고 저서가 있고 주장이 있는데 존 매키가 서번트 리더십(servant leadership) 이라고 잠깐 언급을 했습니다. 우리말로는 섬김의 리더십이라고 그러는데 제가 봤을 때는 표현이 조금 어색합니다. 섬김이라는 표현이 우리하고 잘 안 맞는 것 같아서 좋은 게 없을 까 하다가 영화 명량을 보다가 탁 왔습니다. 충의 리더십이다. 그런데 중요한 것은 그 유명한 대사 ‘무릇 장수된 자의 의리는 충을 따르는 것이되 임금이 아닌 백성을 향해야 한다’ 아들한테 이렇게 이야기합니다.

어쨌든 영화에서 그 장면 기억나십니까? 다르게 이야기하면 여기에서 백성이 우리 기업으로 보면은 고객입니다. 이해 관계자(Stakeholder)입니다. 사장한테 충성하고 회장한테 충성하고 그게 아니고 충에 본질은 이해 관계자한테 충성한다는 것이다. 그것이 본질이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조직에서 조직에서 로열티가 필요한 그 이유는 조직이 이해 관계자들에게 로얄 할 수 있기 위해서 입니다. 그런데 조직 안에서 계급상으로 로열티를 발휘를 했는데 그 조직이 이해 관계자들한테 충성하지 않고 엉뚱한 쪽에만 로얄 한다고 그러면 우리의 충은 거둬들여야 합니다. 거부해야 합니다. 똑 같은 원리라는 것입니다. 결국 이렇게 하는 기업들이 오래갈 기업이 될 것이다. 이런 말씀을 드리고 있습니다.

그래서 마지막으로 리더는 Because, 이래서 안되고 저래서 안되고 이래서 못하고 저래서 못하고 그건 리더가 아닙니다. Because가 아니라 Despite,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한다. 리소스가 부족해서 뭐가 부족해서 뭐가 어째서, 어째서 그거 모르는 거 아닌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한다. 우리 충무공 이렇게 이야기하십니다. 아직도 신에게는 12척의 배가 있습니다. 자기를 그렇게 핍박하고 선조한테 인두를 지져대는 고문을 하고 파직하고 그 선조한테 신에게는 아직도 12척의 배가 있습니다. 충무공 이순신이 선조한테 선조만 바라보고 그렇게 한 충 입니까? 아닙니다. 충무공 이순신에게 백성들이 없었다면 그렇게 하지 않았을 것 같습니다. 그래서 저는 리더십에 결국은 에센스는 Despite라고 이렇게 생각합니다.

 

 

손자영 연구원 (jyson@ips.or.kr)